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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나 Pina Oct 09. 2020

부지런의 범위

어디까지 정리할까 선택하기



 거리두기 2.5단계가 일주일간 시행되고 그 이후로도 지금까지. 한 달도 더 전의 일주일은 외부로부터 별 영향이 없을 것 같던 나도 많은 것이 달라진 시간이었다. 신경 써서 외출을 삼가고 외식도 자제해야 했던 그 때 상황에는, 사람을 자주 만나지 않는 성격인데도 늘 기분이 가라앉아 있었다. 당시 무거웠던 분위기도 그랬고, 내가 이렇게도 하지 말라는 걸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실감하면서 그때는 꽤나 심란한 심정이 되었던 것. 9시 안에 마쳐야 했던, 시간을 내기 힘든 전 직장 동료와의 딱 한 번 식사에도 엄청난 민폐를 끼치는 듯한 기분을 느끼고는 한동안 밖에서의 식사는 엄두도 내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최근까지 마음이 불편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지만 답답한 시간들을 지나면서 나는 귀찮았던 조깅을 저절로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또한 뜻하지 않게 잠을 충분히 자게 되면서 회사도 여유 있게 출근하는 사람이 되기도 했다. 좋게 생각하면 좋은 일들이 분명히 일어났다. 집에만 있어야 하는 상황이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었던 것이다. 더불어 그동안 나는 지금껏 미뤘던 일들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해야 할 일을 짚고 넘어가면서도 시도하지 않았던 범위까지 정리의 단계를 높여보기로 했다.



가장 낮은 난이도


 마른 즉시 빨래를 걷는 부지런함 유지하기. 보통의 나는 일요일 오후에 빨래를 했다. 그래서 월요일 퇴근 후 걷는 것을 규칙으로 만들었다. 그렇지만 나는 집에 오기만 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고 마른 수건과 양말들을 걷어 각각의 방법으로 접어 넣는 것은 점점 힘든 일처럼 느껴졌다. 미루고 미루다 다음 빨래를 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걷는 상태까지 걷잡을 수없이 악화되었는데, 결국 내가 그렇게 성실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기로 했다. 지금은 월요일 저녁에 다 해야겠다는 결심은 어느 정도 포기해버렸다. 대신 누워있다 일어날 때마다 하나씩 걷고, 자기 전 하나씩 접어서 조금씩이라도 해나가기로 했다.



두 번째 난이도


 냉장고 정리 루틴 지키기. 한동안 냉장고 관리를 게을리했더니 역시나 끔찍한 상태였다. 냉장고라는 것이 문을 자주 열고 닫는데도 그 안의 상황은 잊어버리기 쉬워서, 잊는 것도 많고 세심하지 못한 나 같은 사람이 한없이 어지럽히기 쉬운 곳이었다. 그럼에도 내가 2.5 단계든 연휴의 휴일이든 날을 정해 냉장고를 꿋꿋하게 정리해왔던 이유는 있다. ‘정리 따윈 잊어버리고 남은 공간에 대충 쑤셔 넣을 것인가’를 스스로에게 자주 물어본 것과 절대 그러고 싶지 않았던 마음이 컸기 때문이다. 나는 결코 정리를 하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오기 비슷한 것 같다.



세 번째 난이도


 종량제 봉투 접어 수납하기. 정리를 배웠을 당시, 주방 정리수납에서 인상적인 한 부분을 차지했던 하나인 비닐봉투 수납. 갖가지 크기의 비닐봉투와 종량제 봉투가 착착 접혀 다이소 리빙박스에 담기는 장면을 목격했던 나는 시간을 보낼 방법으로 과감하게 이것을 선택하게 되었다. 심지어 방법도 잊어버리지 않은 채 기억에 남아있었다(사실 민소매 상의 접는 방법과 비슷하다). 이런 것까지 각 잡아서 수납하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그 일을, 도무지 시간을 보내는 방법이 생각나지 않는 때에 하고야 만 것이다. 마치 정리 강박을 가진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을 느끼면서.





 10리터 용량의 종량제 봉투 20장은 거의 한 시간을 꼬박 투자해 다 접어낼 수 있었다. 처음 시작할 때 이게 의미가 있을까 싶은 우려와는 달리 마치 뜨개를 하거나 퍼즐을 맞추는 것처럼 생각을 비우고 집중했던 시간이었다.



 내가 끌고 나가는 모든 일들이 그렇듯, 나만의 범위를 잡아두고 지킬 것. 시간이 많아진 내가 정리에 있어서도 다시금 정해두어야 할 부분이었다. 어디까지 혹은 얼마나 자주 부지런을 발휘해 정돈할 것인지를. 그러니까 나는 일주일에 한 번씩 냉장고를 정리하는 동시에 접어놓은 종량제 봉투를 다 쓰고도 똑같은 행위를 반복할 것인지를. 쉽지 않겠지만 다음 20장을 사들였을 때는 조금 기꺼운 마음으로 접기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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