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부터 친한 사람들을 만나면 최근 있었던 기분 좋은 일을 나누는 시간을 갖고 있다. 이 대화 주제는 상당히 힘이 세서 말하는 사람은 그 기억을 다시 상기시키는 것으로, 상대방은 그것을 듣는 것만으로 함께 행복해지는 좋은 주제라고 생각한다. 그것들이 아주 사소한 일이든 커다란 일이든 전혀 상관이 없었다.
기쁨을 서로 공유하는 순간이 주는 분위기 덕분에, 그날 만남 전체가 인상적으로 남을 때가 많았다.
주변 사람들과의 몇 번의 대화 속에서 내가 상당히 자주 말하고 있는 일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새 러닝화를 산 일이다. 나는 발 볼이 좁은 스타일의 260mm 사이즈 러닝화를 샀다. 정확히 말하면 고르는 과정에서 어떠한 검열이나 주저함 없이, 또 가장 편하게 신을 수 있는 신발을 산 것. 발을 스캔해 내 발 모양과 정확한 사이즈를 알고는 평소 신던 것과는 아주 다른 사이즈의 러닝화를 샀다. 지금껏 나는 250 사이즈의 운동화나 러닝화를 관성적으로 사고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발이 크다는 것은 은근한 스트레스였다. 지금은 수가 아주 많이 늘었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여자 사이즈는 250까지 판매하는 브랜드가 대부분이었다. 거리를 지나다 충동적으로 구두를 산다는 일은 상상할 수도 없었고, 낮은 굽의 로퍼를 산다 해도 주문 후엔 제작을 따로 기다려야 했다. 거대하게 느껴지는 신발들 때문에 신고 나가면 너무 발이 커 보이진 않을까 신경 쓰고 전전긍긍하는 것도 자연스레 몸에 배게 되었다.
아빠는 엄마에게 저 아이가 저렇게 발이 큰 이유는, 꽉 끼는 신발을 신겨주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말을 가끔 했다. 내가 옆에서 듣는 당사자인 내가 주눅이 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 당시 아빠는 내가 그대로 어른이 되면 마음대로 신발을 사지 못할까 걱정하는 의도였지만 몸의 사이즈 덕분에 우려를 불러일으킨다던가,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부담을 처음 느꼈던 것 같다. 그러니까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나는 작은 발을 위해 전족을 하듯 갑갑하게 살았어야 했나 싶은 것인데, 현대를 사는 나에게 절대 일어나서는 안될 일이었다.
크던 대로 컸다는 이 당연한 사실에도 커다란 발이 내겐 컴플렉스처럼 느껴졌고 나는 더 넉넉한 사이즈를 선택하기를 주저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렇게 250의 운동화, 스니커즈에 발을 맞춘 채 적당히 살아왔다. 지금껏 러닝화를 사면서도 똑같은 선택을 반복했다. 아무래도 러닝화는 약간의 여유가 있는 편이 좋다. 딱 맞거나 답답하게 신으면 러닝 할때 발의 피로도를 가중시키고 발톱도 더 상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나는 나를 편하게 해주려고 하지 않았는지, 분명 내 발은 이게 아니라고 신호를 주었지만 그저 무시하고 말았던 것.
그 오랜 시간들을 뒤로한 채 정확한 발 사이즈를 확인하고 편한 러닝화를 사는 일. 어떤 해방감 비슷한 기분을 가져다주었다는 점에서, 살면서 드물게 일어났던 충격적인 사건 중 하나라고도 말할 수 있다. 내 몸을 제대로 보게 된 이 사건과 같은 일을 통해 나의 신체적 특징은 말 그대로 특징일 뿐이며 사이즈를 선택할 권한은 내게 주어진 것이고, 나는 그것을 행하면 될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내 발이 커 보이든 말든 사실 주변 사람들은 아무런 관심이 없고 의식하는 것이 오히려 부자연스럽다는 것도 함께.
나는 어떤 신발이든 편한 쪽을 사면 되는 일이었다. 남자 사이즈의 러닝화든 255의 로퍼든 무엇이든 내가 편하게 받아들이는지가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고 말았다. 덕분에 사이즈를 고르는 데서 이전보다 훨씬 자유로워졌고, 그래서 이 일을 주변에 이야기하는 나의 모습이 유독 더 밝아 보였다는 걸 알아차렸다. 지금껏 글로만 봐왔던 ‘자유’라는 단어가, 나에게로 이렇게 선명히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