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냉장고가 비었다가, 다시 채워졌다. 추석 연휴에 집에 다녀온 덕분이었다. 냉장고에 가져온 전이며, 과일에 김치를 넣다 새삼 냉장고 안이 눈에 들어왔다. 요즘은 무엇을 먹고 있으며 또 관심을 두는 지가 보였다. 또 한동안 요리를 해낼 여유라고는 찾아볼 수 없고, 모든 것이 귀찮아진 내 모습이 선명하게 나타난다. 챙겨온 것은 며칠 나의 식사에 등장할 것이다. 명절에 먹는 음식을 좋아하는 나는 아니지만 어떻게든 조금씩 소진해 내야 했다.
짧지 않은 시간을 혼자 살며 나에 대해 파악한 것 중 하나는 냉장고에 들어갔다 나온 음식은 도무지 먹기가 싫어진다는 점이다. 입맛이 까다로운지 밑반찬을 만드는 일이 귀찮아졌는지 혹은 둘 다인 것도 같고. 냉장고에서 꺼내온 남은 음식을 여는 순간 처음 먹을 때 솟아났던 애정과는 별개로 기분은 어쩐지 가라앉고 만다. 이것만 아니면 뭐든 맛있게 먹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덕분에 나는 반찬을 챙기는 대신 1~2번에 먹을 수 있는 음식만 아주 가끔 만드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냉장고에 들어간 것은 아주 쉽게 잊어버린다는 것도 깨달았다. 신기하게도 냉장고 속 세계는 마치 하나의 블랙홀과 같아서, 아무리 작은 사각형 칸 안이라도 시야에 벗어난 식재료는 쉽게 잊고 마는데 이따금씩 그 블랙홀에서 건져 올린 식재료는 먹을 수 없는 상태의 폐기물로 모습을 드러냈다. 시간 감각이 갈수록 떨어져 언제부터 있었는지 아득한 것들 투성이. 덕분에 신선식품으로 흔히 분류되는 것들을 아무리 싸다 한들 여러 개 사둘 수 없는 사람도 되었다.
더 이상 냉장실에 해놓는 소분은 그 의미를 상실했고 어쩌다 남은 것들이 밀폐 용기 하나에 모두 담겼다. 파우치 하나엔 여러 과일들이 섞여 있다. 다 때려 넣은, 엄밀히 말해 정리와 거리가 멀어진 상태지만 보기에는 훨씬 좋아 여기에 만족하고 말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달라지는 것들은 옷 입는 스타일처럼 외형적인 모습에 머무르지 않았다. 내가 무엇을 사고 있는 지도 꽤, 활발하게 바뀌는 중이다. 나의 관심과 취향에 따라 음식의 선호도는 바뀌었고 단순하게는 무엇인가에 새로 꽂히기도 한다. 물가처럼 어쩔 수 없는 것들도 있다. 채소 물가가 한없이 올라버린 지금은 버리는 채소를 한 개도 만들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냉동을 하거나 찌개 밀키트를 사기도 한다. 배달 음식보다 냉동 피자를 자주 먹고, 논알콜 맥주를 사다 놓기 시작했으며, 프로틴이 든 음료에 관심을 갖는 소소한 변화도 생겼다.
실은 냉장고가 좀 더 컸다면 생각하지 않아도 될 문제들이 있다. 며칠 전처럼 집에서 더 많은 과일을 싸들고 왔을 텐데, 아쉬워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당장 내가 더 큰 냉장고를 사지 않는 이상 해결할 수 없는 일. 덜 넣을수록 홀가분하다는 방침을 어떻게든 냉장고에도 적용하고 있는 중이다. 내 일상의 평온함은 이렇게 지켜나가겠다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