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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나 Pina Sep 22. 2022

정돈된 냉장고가 주는 평온함

 한동안 냉장고가 비었다가, 다시 채워졌다. 추석 연휴에 집에 다녀온 덕분이었다. 냉장고에 가져온 전이며, 과일에 김치를 넣다 새삼 냉장고 안이 눈에 들어왔다. 요즘은 무엇을 먹고 있으며 또 관심을 두는 지가 보였다. 또 한동안 요리를 해낼 여유라고는 찾아볼 수 없고, 모든 것이 귀찮아진 내 모습이 선명하게 나타난다. 챙겨온 것은 며칠 나의 식사에 등장할 것이다. 명절에 먹는 음식을 좋아하는 나는 아니지만 어떻게든 조금씩 소진해 내야 했다.



 짧지 않은 시간을 혼자 살며 나에 대해 파악한 것 중 하나는 냉장고에 들어갔다 나온 음식은 도무지 먹기가 싫어진다는 점이다. 입맛이 까다로운지 밑반찬을 만드는 일이 귀찮아졌는지 혹은 둘 다인 것도 같고. 냉장고에서 꺼내온 남은 음식을 여는 순간 처음 먹을 때 솟아났던 애정과는 별개로 기분은 어쩐지 가라앉고 만다. 이것만 아니면 뭐든 맛있게 먹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덕분에 나는 반찬을 챙기는 대신 1~2번에 먹을 수 있는 음식만 아주 가끔 만드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냉장고에 들어간 것은 아주 쉽게 잊어버린다는 것도 깨달았다. 신기하게도 냉장고 속 세계는 마치 하나의 블랙홀과 같아서, 아무리 작은 사각형 칸 안이라도 시야에 벗어난 식재료는 쉽게 잊고 마는데 이따금씩 그 블랙홀에서 건져 올린 식재료는 먹을 수 없는 상태의 폐기물로 모습을 드러냈다. 시간 감각이 갈수록 떨어져 언제부터 있었는지 아득한 것들 투성이. 덕분에 신선식품으로 흔히 분류되는 것들을 아무리 싸다 한들 여러 개 사둘 수 없는 사람도 되었다.



갑자기 파란색 투성이가 된 냉장고. 세 번째는 그저 비어있다.



 더 이상 냉장실에 해놓는 소분은 그 의미를 상실했고 어쩌다 남은 것들이 밀폐 용기 하나에 모두 담겼다. 파우치 하나엔 여러 과일들이 섞여 있다. 다 때려 넣은, 엄밀히 말해 정리와 거리가 멀어진 상태지만 보기에는 훨씬 좋아 여기에 만족하고 말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달라지는 것들은 옷 입는 스타일처럼 외형적인 모습에 머무르지 않았다. 내가 무엇을 사고 있는 지도 꽤, 활발하게 바뀌는 중이다. 나의 관심과 취향에 따라 음식의 선호도는 바뀌었고 단순하게는 무엇인가에 새로 꽂히기도 한다. 물가처럼 어쩔 수 없는 것들도 있다. 채소 물가가 한없이 올라버린 지금은 버리는 채소를 한 개도 만들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냉동을 하거나 찌개 밀키트를 사기도 한다. 배달 음식보다 냉동 피자를 자주 먹고, 논알콜 맥주를 사다 놓기 시작했으며, 프로틴이 든 음료에 관심을 갖는 소소한 변화도 생겼다.


 실은 냉장고가 좀 더 컸다면 생각하지 않아도 될 문제들이 있다. 며칠 전처럼 집에서 더 많은 과일을 싸들고 왔을 텐데, 아쉬워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당장 내가 더 큰 냉장고를 사지 않는 이상 해결할 수 없는 일. 덜 넣을수록 홀가분하다는 방침을 어떻게든 냉장고에도 적용하고 있는 중이다. 내 일상의 평온함은 이렇게 지켜나가겠다며.




어쩌다 생기는 과일이라면 파우치에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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