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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나 Pina Nov 17. 2019

수십 가지의 안 할 이유

조금씩 나이를 먹어가며 나라는 사람에 대해 확신하게 된 것이 있다. 나는 모든 일에 동기와 명분을 세워두길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 어떤 행동 하나에 명분을 찾는 것은 물론이고 반대로 하고 싶지 않은 일까지, 안 할 명분을 든든하고 다양하게 준비하는 나를 발견했던 순간 그 사실을 아주 강하게 깨닫게 되었다. 평소 명분이라는 단어를 자주 쓴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한창 러닝을 했던 기간, 동시에 러닝을 안 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 커서 그때의 저는 러닝을 안 해야 할 핑계를 찾아내는데 열심이기도 했다. 그 당시 그런 핑계의 명분들이 리스트로 추려질 만큼 두터워졌다는 사실이 스스로도 기막히고 우습지만 적어보도록 하겠다.


그 당시 나를 발목 잡은 핑계들:

1.몸 컨디션이 별로다

2.하기 좋은 날씨가 아니다(비가 온다, 바람이 심하다, 너무 덥다 등)

3.저녁을 늦게 먹었다

4.운동복 빨래를 미처 하지 못했다 

5.약속이 있다

6.청소 혹은 정리가 급한 상태

7.무언가를 쓰거나 편집할 일이 있다

 이외 다수-


 러닝을 안 하는 날의 나는 위에 적어둔 안 할 핑계들을 꼭 하나씩만 꺼내들지는 않았다. 정말 우연하게도 안 할 이유들은 거의 두세 개씩 겹쳐져 있고 결국 뛰지 않는 선택을 하곤 했던 것. 가령 몸 컨디션이 별로인데 저녁도 늦게 먹었다든지, 날도 안좋은데 이런 날은 미뤘던 화장실 청소나 해두는 게 더 낫겠다는 식인 것이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아래의 이유들이다.


강력한 한 방이 되는 핑계들:

1.회사에서 너무 화가 났기 때문에 아무것도 안 하며 마음의 안정을 찾겠다

2.오늘은 쉬지만 내일은 할 것 같다 

3.내가 하기 싫은 걸 뭘 어째


 이런 이유들은 정말 별것 아니지만 저의 의욕과 기분에 관련이 있다. 이렇게 아무 의욕도 들지 않는 날이면 나가기는커녕 집에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기분은 너무 강력해서 두세 개씩 찾을 것도 없이 저 이유들 중 하나면 러닝 계획은 저절로 없던 일이 되고, 오늘은 뛰지 않아야 행복하겠다면 기꺼이 접게 된다. 그러던 중 모든 것을 이기고 문밖을 나서는 날이 오면 이전까지 보였던 한심한 모습 대신, 그날만큼은 계획을 달성한 성실한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 뿌듯함은 또 매우 커서, 달리는 일을 놓지 않고 계속하게끔 하는 동력이 된다.

 

 러닝을 가지 않을 때 물론 죄책감을 가져도, 나는 이것밖에 안되는 사람이라며 심하게 자책하지는 않으려고 한다. 오늘의 나로 내일의 나를 판단하지 않겠다,는 말도 안 되는 나름의 이유도 준비해두었기 때문이다. 나를 이 정도 밖에 안되는 사람으로 섣부르게 판단하면, 그것은 곧 그날뿐 아니라 언제든 안 할 사람이라는 뜻이기도 하다면서.



 대신 나는 어떤 행동을 할 때 명분을 만드는 일에 집중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명분을 세우는 사이 사소한 일은 거대한 일이 되어버리고 부담이 되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다. 언뜻 보면 모든 일에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심하게는 끝내주는 핑계를 만드는 능력이 생겨버린 것 같다. 그러니 일상적인 일에는 크게 고민하지 않으려는 삶의 태도를 장착하려고 한다. 오늘만큼은 별생각 없이 러닝화를 신고, 문을 열어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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