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절을 소환하는 특별한 주문
외할아버지의 노트는 오래된 기억의 창고다. 세월이 흐른 만큼 노트는 낡았지만, 삶의 순간을 기록하던 할아버지의 부지런한 마음은 조금도 바래지 않았다.
외할아버지의 노트는 군이나 기업에서 나누어 주던 노트였다. 그 안에는 농사일지부터 마을의 경조사, 밤 수확량까지 정리되어 있으며 색인 작업도 되어있다. 기록은 1989년 농협 노트부터 남아있지만, 그 이전에도 꾸준히 써오셨다고 한다. 89년 이전의 노트들은 안타깝게도 대부분 분실했다고 하셨다.
가장 오래된 노트는 얇은 종이로 제본된 공책이다. 한때 다른 용도로 쓰려다 제목을 지우고 ‘중요사황(중요사항)’이라 다시 쓴 흔적이 남아 있다. 당시 종이가 얼마나 귀했는지를 생각하면 그 흔적마저도 값지다.
이제는 폰 하나면 사진, 영상까지 찍을 수 있고, 방문한 장소, 구매 내역까지 자동으로 기록되는 시대다. 그런 세상에 살고 있어서 그런지, 할아버지의 노트가 더욱 귀하게 느껴진다.
공책을 펼치면 제일 처음 보이는 것이 핀으로 고정해 둔 '도정공장 매도계약서'다. 1971년 여름, 할아버지는 친구분과 함께 외갓집이 있는 동네에서 제법 떨어진 장대리의 정미소를 사셨다. 두 분이서 정미소 겸 방앗간을 제법 오래 운영하셨다고 한다.
할아버지께서는 정미소까지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하셨다. 한참 도정 일이 많은 가을, 일이 늦게 끝날 때면 해가 지고 나서야 퇴근을 할 수 있었다. 가로등도 없던 시절, 할아버지는 어두컴컴한 길을 되짚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무서웠다고 하셨다. 늦은 밤이 되면 장대 마을 사람들이 함께 나와 귀가를 도와주곤 했단다.
할아버지가 정미소를 운영하던, 엄마가 10대였던 시절의 이야기다. 그때는 여자가 자전거를 탄다는 것만으로도 손가락질을 받던 시대였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그런 시선보다 딸의 마음이 중요했다. 자전거를 타고 싶어 하는 딸을 위해 직접 타는 법을 가르쳐주시고, 한적한 논길에서 마음껏 연습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다.
명절이 되면 정미소에서 가래떡을 뽑았다. 자전거에 자신이 붙은 엄마는 외갓집에서 쓸 가래떡을 받으러 홀로 길을 나섰다. 할아버지를 만나 갓 뽑은 따끈하고 말랑한 가래떡을 받고 짐받이에 싣고 돌아오던 길, 그만 자전거가 넘어지고 말았다. 엄마는 흙바닥 위를 구르는 가래떡을 보며 어쩔 줄 몰랐다고 하셨다.
할아버지의 노트에는 이렇듯 시간을 거슬러 잊었던 순간을 부르는 특별한 주문이 담겨 있다.
1973년 6월, 섬이던 남해를 육지와 이어주는 남해대교가 완공되었다. 남해대교는 우리나라 최초의 현수교이자, 산업화의 상징이었다. 웅장한 교각 아래로 푸른 바다가 펼쳐지고, 그 위로 철선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당시 남해대교는 모두가 한 번쯤 사진을 남기고 싶어 하던 기념사진 명소였다.
이듬해, 1974년. 할아버지는 마을 사람들과 단체로 남해대교 여행을 떠났다. 목수이기도 했던 할아버지에게 그 다리는 낯설고 신선한 충격이었다. 나라의 성장과 가능성을 눈으로 마주했던 벅차오르는 순간이기도 했다.
“저거 하나 가져가서 엿 바꿔 먹으면 많이 주겠다.”
철로 만든 다리를 보고 엿장수를 떠올린 어린 아들의 말에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여행을 다녀온 뒤, 할아버지는 남해대교의 길이와 폭, 높이를 기억해두었다가 노트에 꼼꼼히 적어두셨다. 흑백 사진의 여백에는 그날의 날짜를 또박또박 적어 두었다. 지금의 우리에게는 사진 한 장으로 남을 여행을 할아버지는 펜으로 새기고 계셨다.
나는 언제나 더 많은 것을 기록하려 애쓰지만, 쉽게 기록하는 만큼 쉽게 잊는다. 할아버지는 몇 줄의 글씨만을 남겼지만, 오래도록 선명하게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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