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아버지의 기록
외할아버지의 서랍에는 오랜 기록들이 담겨 있다.
봄의 파종부터 가을의 수확까지, 마을 사람들의 경조사와 자식들의 글씨.
줄을 그으며 공부했던 일제강점기 소학교의 책자까지 고이 남아 있다.
할아버지께선 평생을 기록하며 사셨다.
새로 산 가전제품에는 구매한 날짜를 적으셨고, 흑백 사진의 뒷면에도 날짜와 장소가 꼼꼼히 적혀있다.
나는 어릴 적부터 할아버지의 기록물이 참 좋았다.
노트마다 조금씩 다른 볼펜과 연필의 흔적, 닳은 모서리, 눅눅한 종이 냄새.
그 모든 것에 매 순간을 소중히 간직하려 했던 할아버지의 마음이 담겨 있다.
언젠가 외할아버지의 노트에 해석을 덧붙인 메모지를 붙이며, 혼자 막연히 생각했다.
‘할아버지께서 백세가 되시는 해에 전시를 해야지.’
그때의 다짐과 적어둔 메모지의 존재도 잊은 채, 시간이 흘렀다.
"손이 떨려서 도저히 글씨를 못쓰겠다."
어느 날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이제는 간단한 한 줄 적는 것조차 힘들다고 하셨다.
당신께서 돌아가신 뒤에 손글씨가 필요한 것들을 미리 써두어야겠다며, 그 일을 나에게 부탁하셨다.
부쩍 약해지신 할아버지를 보며 그동안 마음속에만 품어두었던 일을 실천하기로 했다.
다가오는 생신을 맞아, 할아버지의 기록물들을 세상에 내보이기로 했다.
할아버지의 따스한 손글씨를 손녀의 언어로 옮겨 보려 한다.
우리 외할아버지가 기록한 시간들이 오래도록 많은 이들의 마음에 닿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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