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글씨로 남은 지난 발자국
외할아버지의 89년도 농협 노트 제일 첫 장에는 '경력'이라는 기록이 있다. 말 그대로 할아버지가 걸어오신 길을 차곡차곡 담은 페이지다. 빛바랜 종이 속에 오랜 세월이 질서 정연하게 줄지어 있었다.
1960.9.30 상량
1961.1.1 (음 11.15) 입주
1938.4.1 국교 입학
44.3.25 졸업
50.10.1 향토방위대
52.11.25 군입대
57.3.20 제대 (군번 9262419)
59.4 의용소방대
75.7.21 봉기마을 이장
81.11.6~11.9 새마을 영농회장 광주 연수원 교육
84.8.5~8.9 사회지도자 교육 (창원 연수원)
84.11.3 합천 경찰서장 상
86.4.28~30 사회정화위원 교육 (진주 연수원)
86.12.31 도지사 표창장
89.12.30 도지사 표창장
92.3.14 봉기마을 이장 사표
93.9.15 싸이카 면허 (번호 경남 93-094805-30)
2000.3.6 봉기마을 노인 회장
2008.5.14 가회면 노인회장 선출
처음엔 솔직히 조금 의아했다. 누구에게 보여줄 것도 아닌데, 굳이 날짜까지 함께 적어둘 이유가 있을까 싶었다. 오토바이 면허를 딴 날과 면허 번호까지 적혀있는 걸 보고 웃음이 나기도 했다.
사람은 모두 지나온 길에 발자국을 남긴다. 기록하지 않으면 흩어진다. 할아버지의 경력 페이지는 색이 바래었지만, 적힌 날짜들은 또렷하다. 그것은 단순한 경력의 목록이 아니라, 살아온 생의 흔적이었다.
외할아버지는 1931년에 태어나셨다. 일제강점기의 혼란을 지나 청년이 되었고, 전쟁의 아픔도 겪으셨다.
1950년 10월, 전쟁이 터진 지 세 달쯤 지난 시점에 외할아버지는 향토방위대에 들어가셨다. 1951년 8월 10일, 합천 황매산 일대에서 활동하던 무장공비가 가회지서를 습격했다. 당시 열 명이 전사했고, 전사자 중에는 할아버지의 친구들도 있었다. 2016년 전투 전적비를 세우기 전까지, 이 사건은 오랜 시간 할아버지 마음속에 한으로 남아 있었다.
1952년 군에 입대하고, 스물다섯이 되던 해에 열아홉의 할머니와 결혼하셨다. 두 분의 결혼은 어느덧 70년의 세월을 지나왔다. 1959년에는 의용소방대에 들어가셨고, 1961년 첫째 딸 희정을 품에 안았다. 이후 오 남매를 차례로 낳고 길렀다.
할아버지는 마을의 중요한 순간마다 그 자리에 계셨다. 교회 상량을 준비할 때도, 중학교를 지을 때도, 지금은 철쭉과 억새로 유명한 황매산 개간에 참여할 때도, 사진 속에는 젊은 할아버지의 모습이 남아 있다. 목수이자 청년이었던 할아버지는 언제나 기꺼이 마을의 곁에 서 있었다.
그런 할아버지가 17년간 이장으로 마을을 이끌며 남긴 자취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깊이 새겨졌다. 1992년 이장직을 내려놓으셨는데, 내가 성인이 되어서도 여전히 몇몇 어르신들은 할아버지를 ‘이장님’이라고 부르셨다. 그 말속에는 말로 다할 수 없는 성실함의 무게가 담겨 있었다.
1993년 오토바이 면허를 딴 기록 이후 오랫동안 경력란이 한동안 비어 있었다. 줄이 채워지지 않는 시간에도 할아버지는 아버지로서, 할아버지로서 가족의 삶을 단단히 지탱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셨다.
할아버지의 노트 첫 장에는 말로는 다 못할 세월들이 손글씨로 새겨져 있다. 꿋꿋하게 걸어온 지난날들을 스스로 다독여주고 싶었던 마음이 아니었을까. 나는 그 안에서 평생을 ‘사는 일’에 성실했던 한 사람을 만났다. 그렇게 외할아버지는 언제나 기록하듯 삶을 살며 존재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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