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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ine Aug 23. 2019

12. "고산진"과 "건지리"에서

6.25전쟁 70주년을 맞으며

유엔군과 한국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자 김일성은 후퇴명령을 내리고 중국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리고 유엔군과 국군이 38선을 돌파하고 평양까지 진격하자 도망쳤다. 김일성은 얼마나 다급했는지 타고다니던 승용차까지 청천강변에 버리고 도망쳤다. 학도병 출신 임일재씨를 비롯한 6사단 국군 병사들은1950년 10월 22일 김일성이 경북 칠곡군 왜관읍까지 타고 다니며 인민군을 독려했던 옛 소련제 '지스(ZIS) 리무진'을 평안북도 영변군의 청천강가에서 노획했다.


북한 혁명역사에서는 김일성이 자강도 만포의 고산진에서 반공격의 구상을 무르익혔다고 설명한다. 김일성이 중국까지 도망쳤다 다시 나왔는지 아니면 평양에서 고산진으로 직행했는지 여부는 모르겠다. 하여튼 김일성은 고산진에 최고사령부를 두고 있었다. 김일성은 고산진에서 북한군 부대들의 후퇴를 지휘하고 최현의 적후군단을 지휘했다고 북한은 교육한다. 아래 사진에서 '고산리'를 찾아보시면 아시겠지만 고산진은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바로 중국과 마주하고 있다. 여차하면 중국으로 건널 판이었다. 김일성은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당시 백두산에 다시 들어가 싸울 마음의 각오를 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중공군이 인해전술로 전세를 역전시키면서 평양과 38선을 지나 서울, 수원까지 전선이 남하하자 김일성은 평양교외의 건지리로 최고사령부를 옮긴다. 여기서 김일성은 휴전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땅굴에 있는 사령부에서 지냈다고 한다. 훗날 김정일이 “심화조사건”을 일으켜 많은 고위간부들을 숙청한 명분이 바로 이 건지리 최고사령부를 노리고 침투됐던 미국의 고용간첩들이 전후 북한에서 고위층의 자리에까지 올라 북한 지도부 전복을 꾀했다는 것이었다.


남로당 총책이자 북한의 부수상이었던 박헌영을 미국의 고용간첩으로 몰아갔던 것도 이 건지리에서였다. 박헌영과 서울시 인민위원장이자 군사위원이던 이승엽도 미국과 내통해 김일성을 제거하기 위해 미군에 건지리 최고사령부 위치를 알려주고 심지어 김일성 정권 전복을 위해 쿠데타를 계획했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김일성은 이 건지리에서 전쟁이 아니라 정적 제거에 더 신경 썼던 모양이다. 하기는 중공군의 팽덕회가 전쟁을 거의 다 치다 싶이 했으니 김일성은 자리보전에만 급급해 있었던 것 같다. 또 전쟁패배의 책임을 누구에게 전가할지만 고민했겠다 싶다. '부전자전'이라고 김정일은 김일성 사후 건지리와 연계된 노간부들을 모두 제거하는 심화조 사건으로 유일독재 체제를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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