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70주년을 맞으며
김일성 혁명역사에 수록된 낙동강전투는 6.25전쟁의 치열함과 전쟁의 잔혹성을 대표하고 또 적화통일 야욕이 목전에서 좌절된 아쉽고 또 아쉬운 전투이다. 물론 한강도하전투와 금강도하전투도 언급돼 있지만 낙동강 전투에 비할 바가 아니다.
북한에서 6.25전쟁을 논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언급되는 전투가 바로 "낙동강"과 월미도, 1211고지와 351고지 전투다. 참전노병들에게 붙는 수식어가 "낙동강까지 나갔던 인민군 병사들"이다. 군부대가 동원된 주요 국가건설 현장에 가면"불타는 낙동강을 거느던 전화의 용사들처럼 나를 따라 앞으로!"라는 선동구호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낙동강까지 남진했던 북한군 장병들은 6.25전쟁의 상징적 군상이 됐다.
전쟁 개시 두 달 만에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간 북한군은 미군과 국군의 방어선에 막히게 됐다. 더는 물러설 곳이 없는 국군의 분전과 미군의 항공지원, 포격으로 북한군은 번번히 고전을 겪었다. 지칠 대로 지친데다 전차도 거의 파괴되고 병력손실도 컸던 북한은 낙동강전선에서 더는 전진할 수 없었다.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되고 낙동강전선에서도 전열을 정비한 국군과 미군이 반격에 나서면서 북한군은 추풍낙엽 신세가 된다.
북한군은 후퇴를 할 수밖에 없었다. 북한은 낙동강전선에서 수많은 북한군이 목숨을 잃었다고 교육한다. 또 통일을 눈앞에 두고 피눈물을 뿌리며 돌아섰다고... 낙동강전투는 북한 지도부와 북한군에게는 영원히 아물지 않는 상처이고 아쉬움이다. 낙동강전투를 기점으로 북한군은 다시는 6.25전쟁에서 주도권을 잡지 못한다.
북한에서 6.25전쟁 참가자들 가운데 제일로 쳐주는 노병들이 바로 낙동강전선까지 나갔던 사람들이다. 내가 살던 마을에 6.25전쟁에 참가했던 노병이 한 명 있었는데 그 사람이 낙동강전투에 대해 간간히 들려주곤 했다. 낙동강전선까지 나갔을 때 보급이 제대로 되지 않아 일부 병사들은 총도 없이 몽둥이를 들고 전투에 동원됐다고 한다. 북한군의 시체가 산을 이루고 낙동강물이 피로 물들여져 시뻘건 물이 흘렀다고 했다.
후퇴명령이 내리자 간호병으로 나갔던 북한군 여자병사들이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자”며 남자병사들 바지가랭이를 붙잡고 늘어지는 바람에 죽은 병사들도 꽤 많았다고 했다. 그 노병은 걸쭉한 사투리로 “간나들은 군대 나가면 안 돼. 정작 죽을 고비에 부닥치면 물고 늘어져서 다 같이 죽는 거야” 이렇게 말하곤 했다. 그러면서 그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끔찍하다며 전쟁은 무서운 거라고 도리머리를 흔들곤 했었다.
낙동강에서 북한군을 막아냈기에 대한민국은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가까스로 회생할 수 있었다. 그때 그곳에서 북한군과 맞서 낙동강을 지켜낸 국군과 학도병들의 희생이 있어 오늘날 대한민국의 자유와 번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