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70주년을 맞으며
4계단... 한국에서는 "4단계"라고 써야겠지만 북한에서는 6.25전쟁을 "4계단" 작전으로 나눠 치렀다고 설명한다. 북한은 이른바 “조국해방전쟁” 제1계단 작전에 대해 이렇게 기술한다. 김일성은 1계단 작전에 대해 미군과 국군을 속전속결로 섬멸하고 빠른 시간동안에 남한지역을 점령하고 기동성 있게 남, 서, 동해안에 해안포를 배치해 미 증원병력의 상륙을 막는 것으로 설정했다.
하지만 6.25전쟁 초기에는 북한의 계획대로 돼 가는듯하다가 일이 틀어졌다. 낙동강전선에서 한국군과 미군이 필사적으로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한데다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낙동강전선에 집중돼 있던 북한군 주력은 포위될 처지에 놓였다.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과 국군의 반격으로 포위섬멸당할 위기에 놓이자 북한은 초기의 전쟁계획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북한은 후퇴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른바 "조국해방전쟁" 제2계단은 전략적 후퇴이다.
3계단은 반공격, 그러니까 한국은 1.4 후퇴 시기의 단계이다. 그리고 4계단은 38선 지역에서 북한군과 중공군이 적극적인 진지전을 벌이면서 차지한 영토를 지키고 더 많은 남한 영토를 빼앗는 단계이다.
북한은 6.25전쟁 4계단에서 김일성이 갱도전법과 “땅크 사냥군조”, “비행기 사냥군조”, “저격수조” 활동 등 유격전법에 기초한 전술들을 많이 개발했다고 교육한다. 이 시기 고지전에서 북한은 38선 기준으로 동부지역은 한국군에게 많이 잃었고 서부지역은 기존보다 남쪽으로 더 확보했다. 일설에 따르면 동부전선에는 한국군 병력이 집중적으로 배치돼 있었고 서부전선에는 미군 등 유엔군 병력이 상대적으로 더 많았다고 한다. 한 치의 땅이라도 더 확보하기 위해 한국군 장병들이 그만큼 더 많은 피를 흘리면서 희생을 치렀다는 말이 된다.
북한에서는 이런 말을 한다. 6.25전쟁을 통해 "'도토리'(강원도 등 동부산간지역 의미)는 좀 잃었지만, 대신 '쌀'(황해남도 등 서부평야지대)을 확보했다"고 말이다. 면적상으로 따지면 한국이 확보한 동부지역의 면적이 북한에 잃은 서부지역보다 더 많기는 하다.
당시 동부전선에 있던 1211고지는 북한이 지켜낸 상징적인 고지이다. 유엔군의 포격과 물량공세로 당시 산 높이가 10m 낮아졌다고 한다. 북한에서 6.25전쟁의 가장 유명한 영웅인 리수복도 이 1211고지 전투에서 나왔다. 리수복은 평안남도 순천 태생으로 6.25전쟁 때 최대 격전지였던 강원도 금강군의 1211고지 좌측 무명고지를 찬탈하기 위한 전투 중 국군의 화구를 가슴으로 막 고 전사한 인물이다. 1952년 4월 공화국영웅 칭호를 받았다.
리수복이 유명해 진 것은 그가 쓴 자작시 때문이다.
이 시는
"나는 해방된 조선청년이다.
생명도 귀중하다. 찬란한 내일의 희망도 귀중하다.
그러나 나의 생명, 나의 희망, 나의 행복, 이것은 조국의 운명보다 귀중치 않다.
하나밖에 없는 조국을 위하여 둘도 없는 목숨이지만
나의 청춘을 바치는 것처럼
그렇게 고귀한 생명, 아름다운 희망, 위대한 행복이 또 어데 있으랴"로 돼 있다.
북한 학교들에는 리수복이 기관총 화구를 막는 모습과 이 시가 복도들에 게시돼 있다. 또 군에 입대하는 청년들이 이 시를 수첩에 써 가지고 다니는 것이 유행되기도 했다. 북한은 지난 1999년 신년 공동사설을 통해 '리수복형의 육탄영웅'이 될 것을 주민들과 군인들에게 호소하면서 '리수복형의 육탄영웅이야말로 신념의 강자, 의지의 강자의 대명사'라고 주장했다. 북한은 또 리수복의 모교였던 순천고급중학교를 리수복순천화학전문학교로 개명했고 학교에 그의 동상을 설립했으며 순천시의 일부를 그의 이름을 따 수복동으로 바꿨다.
북한은 당시 고지전에서 리지웨이 장군과 클라크 장군이 벌인 공세들을 모두 좌절시키고 휴전협정을 승리로 이끌어 마침해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조인을 이끌어 내 “조국해방전쟁”의 승리를 이룩했다고 기술한다. 여기까지가 북한이 “김일성 혁명역사”에서 교육하는 6.25전쟁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