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70주년을 맞으며
북한의 고등중학교 4학년 학생들이 무조건 가입해야 하는 준군사조직과 무조건 받아야 하는 군사훈련이 있다. 바로 “붉은청년근위대” 입대와 15일간의 “붉은청년근위대” 야영캠프이다. 여기는 남녀학생을 불문하고 예외가 없다. “붉은청년근위대”는 6.25전쟁 때 고향땅을 지키기 위해 총을 잡았던 소년근위대의 정신을 이어받아 북한 지도부와 고향마을, 학교, 가족을 지키는 것을 사명으로 한다.
“붉은청년근위대”는 학교가 대대, 학급은 중대로 조직되어 있다. 그리고 4학년 때 15일간의 군사교육을 따로 받는다. 시, 군마다 훈련소가 1개씩 있고 거기에 15일 동안 들어가 기숙하며 군대와 꼭 같은 훈련을 받는다. 1990년 8월 여름방학 동안 나도 온 학급이 함께 군내에 있는 “붉은청년근위대” 야영캠프에 입소했다. 푹푹 찌는 여름 더위에 땀이 비 오듯 쏟아졌지만 흙먼지를 자욱히 날리며 연병장에서 대열훈련(제식훈련)을 했다. AK 자동보총 분해, 결합법도 배우고 조준훈련과 북한군 내무규정도 암기했다. 난생 처음 군대에서 사용한다는 매트리스침대에서 잤다.
야영캠프 훈련 교관들은 정규군복무를 마친 중대장 등 장교 출신들이 맡았는데 이들은 군기를 잡는다면서 학생들이라고 해도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기상동작을 잘 못한다고, 또 침구류정돈이 제대로 안됐다고 연병장을 집체구보로 돌렸고 교체한지 십년은 되는 것 같은 먼지투성이 벼 겨가 담긴 매트리스를 메고 산등성이로 달리게 했다. 선착순이었다. 잘 뛰지 못하는 애들은 땀을 뻘뻘 흘리며 몇번이고 연병장과 산등성이를 뛰어다녀야 했다. 그래서 야영캠프 앞산을 “눈물의 고지”라고 불렀다.
드디어 군사훈련을 마치는 날이 왔다. 이날의 대미를 장식하는 것이 바로 실탄사격이었다. 부모님들도 수료식 날엔 맛있는 음식을 해가지고 야영캠프를 찾아온다. 실탄사격은 100M 떨어진 원형 목표에 실탄 3발을 쏘게 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실탄 한발 당 만점이 10점이다. 사격에 앞서 “조선인민의 철천지원수 미제침략자들을 소멸하라”하고 외치고 “소멸하라”를 세 번 반복한 다음 전호에 들어가 AK 자동보총 실탄을 쏜다. 나는 3발을 쏘았는데 총 26점을 맞혀 “우”를 받았다.
여학생들은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떨다가 옆 학생이 쏘는 총소리에 놀라 엉겁결에 방아쇠를 당겨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러고 나면 10점대도 안 돼 “낙제”를 맞는 일도 많았다. 그러면 여학생들은 울고 불며 야단법석이었다. 개중에는 한 번만 더 쏘게 해달라며 교관에게 읍소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그러나 어림없는 일이었다. 실탄사격에 앞서 “총탄 한 발은 닭 한 마리 값”이고 국가와 인민의 귀중한 재산으로 만든 총탄이니 한 발 한 발 정말 침착하게 쏴야 한다고 단단히 사상교육까지 시켰고 워나 실탄이 부족하다보니 다시 쏘게 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훗날 들어보니 그래도 간부집 아이들 몇몇은 마지막에 남아서 실탄을 몇 발씩 더 쐈다고 한다. 역시 빽이 좋고 권력이 좋았다. 장남인 내가 “우”를 맞았다고 어머니는 엄청 좋아하셨다. “우”를 맞은 학생들에게만 걸어주는 꽃목걸이를 걸고 어머니와 함께 사진도 찍었다. 우리 학급이 52명이었는데 그중 8명만 “우”, 그러니까 25점 이상을 맞았다.
결국 북한의 15세 이상 되는 모든 학생들이 다 총을 쏠 줄 안다. 총을 다룰 줄도 알고... 김일성이 제시한 4대 군사노선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전민 무장화”다. 전체 북한 주민을 무장시켜 조국을 지킨다는 것이다. 아직 총을 들기에는 버거운, 발육이 채 되지 않은 15살의 소년병들을 국가가 양성하는 인권후진국, 그곳이 바로 북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