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70주년을 맞으며
내가 고등중학교를 다니던 어느 해 봄이었다. 해마다 4월이면 학생들도 모두 농촌지원을 나간다. “강냉이 영양단지는 학생단지”란 말이 그래서 나왔다. 농기계도 부족하고 기름도 없다보니 학생들이 농촌지원을 하지 않으면 적기에 옥수수나 벼를 심기 힘들었다. 우리 학급은 읍내에 있는 한 농장에 농촌지원을 나가게 되었다.
그런데 그 마을에 “팔로군 아저씨”라고 불리는 농민이 있었다. “엥? 팔로군이면 장개석 국민당군대와 싸웠던 중국 공산당 군대인데 왜 여기서 살지?” 나는 그 아저씨의 정체가 궁금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아저씨와 함께 일하는 기회가 왔다. 그 아저씨는 강냉이 냉상모판에서 강냉이영양단지를 삽으로 떠주고 나와 한 조가 된 2명의 학생은 그 것을 밭에다 심고 있었다.
그렇게 세 시간쯤 지나자 허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 아저씨에게 좀 쉬자고 졸랐다. 그 아저씨도 그러자고 했다. 그 아저씨는 그때 50대 후반이었는데 짧게 깎은 흰머리가 유난스러웠다. 마라초를 피우고 있는 아저씨에게 내가 물었다. “저기 아저씨. 마을 사람들이 아저씨보고 ‘팔로군 아저씨’라고 하는데 진짜 팔로군이었나요?”
그 아저씨는 담배연기를 맛깔나게 내뿜으며 빙그레 웃으셨다. “그래. 팔로군이었지. 옛날에...” “진짜였네요. 근데 어떻게 여기 사세요?” “응. 팔로군에도 조선동포들이 꽤 있었는데 조국해방전쟁 때 조선에 나왔지” “그럼 전쟁참가자세요?” “응. 그렇지” “와~ 전쟁 얘기 들려주세요” 그 아저씨는 전쟁 때 얘기를 들려주었다.
그 아저씨 말씀이 전쟁은 영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그렇지가 않단다. 아무리 담이 큰 사내라도 첫 전투 때는 바지에 오줌을 갈길 정도라고 했다. 그리고 6.25전쟁 때 조선족들이 많이 참전했는데 전투력이 제일 강해서 항상 선봉에 섰었다고 했다. 조선족들이 참전했다는 사실을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하기는 북한에서 학생들에게 그런 건 안 가르쳐주니까. 한국에 와서 알아보니 6.25전쟁을 도발하기 두 달 전에 벌써 북한은 모택동에게서 전투력이 강한 조선족 사단을 지원받아 이들을 앞장에 내세워 남침을 감행했던 것이다. 김일성이 김일, 김광협을 파견해서 그 조선족 부대를 보내줄 것을 요구하고 그에 따라 허난성의 정저우, 장춘,선양의 부대가 집결하여 4만2천명이 모였다. 이들은 인민군 제 5, 6사단으로 변경됐다. 이 중 1만 4천명은 국공내전당시 중국이 노획한 미군 무기를 가지고 참전하였고 다른 인원은 소련으로부터 무기를 공급받았다. 이 내용은 미국의 첩보기관과 여러 논문, 중국의 문헌에서도 등장한다.
그 팔로군 아저씨 지금 살아 있었으면 아마 80대는 됐을 텐데 아마 북한에 남은 것을 평생 후회하셨을 것 같다. 탈북해서 중국 연길에서 머문 적이 있는데 조선족들의 얘기를 들어보니 국공내전에 참가했던 사람들은 물론 6.25전쟁에 “중국인민지원군”으로 참전했던 사람들에게 엄청난 연금이 나온다고 했다. 그런데 북한에서는 그런 혜택이 거의 없다. 그리고 “고난의 행군” 시기에 농촌사람들이 더 많이 굶어죽었다.
참 아이러니 하지만 농장원들은 농장에서 분배하는 식량에만 의존하게 하고 장사도 못하게 해서 오히려 도시사람들보다 더 굶는 비참한 상황이었다. 또 북한에서 연안파, 소련파, 남로당파, 갑산파를 다 제거하면서 6.25전쟁에 참전했던 조선족 출신 전쟁참가자들은 찬밥신세가 됐다. 북한을 위해 피를 흘렸지만 그 아저씨에게 차례진 것은 북한에서도 하층계급인 농민으로 평생을 뼈 빠지게 힘든 농사일을 하고 그 직업마저 자식에게 대물림해야 하는 노예의 멍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