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 도둑

by 비움과 채움

아침마다 출근길에 마주치던 앞집 할머니는 언제나 밝은 미소로 인사를 건네던 분이었다.

허리가 굽은 몸에도 정성스레 손길을 보태며 가꾼 포도나무 이야기를 들려주실 때면, 그 눈빛은 어린아이처럼 반짝였다. 꽃이 피고, 알알이 열매가 맺히고, 하루가 다르게 살이 올라가는 포도를 바라보며 “이게 나한테는 자식 같은 기쁨이지” 하시던 목소리에는 삶의 위로와 보람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러나 어느 날, 할머니의 집 앞 풍경은 달라져 있었다.

늘 다정하던 인사는 사라지고, 울음을 삼킨 듯 떨리는 목소리만 남아 있었다.

애지중지 가꾼 포도가 단 한 송이도 남지 않고 모두 사라졌다는 소식은 내 가슴을 쳤다.

장난이라면 조금쯤은 남겨두었을 텐데, 모조리 가져간 것은 분명 도둑질이었다.

그 순간 할머니의 허망한 마음은 얼마나 깊었을까.


포도는 단순한 열매가 아니었다.

계절 따라 변하는 가지를 살피고, 물을 주고, 벌레를 쫓고, 햇볕에 곱게 익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할머니의 일상이자 기쁨이었다.

자식 키우듯 정성 들여 키운 열매가 사라졌다는 사실은, 누군가 삶의 보람을 송두리째 빼앗아 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할머니의 울분은 너무도 당연했다.


그 이야기를 듣는 나 역시 분노가 치밀었다. 절로 욕이 튀어나왔다.

“도둑질한 그 포도, 잘도 처먹었냐?”

이 말은 단순한 욕설이 아니라, 할머니의 짓밟힌 마음을 위로해드리고 싶은 울분이었다.

도둑놈이 훔쳐간 것은 포도송이가 아니라, 할머니가 쌓아온 시간과 정성, 그리고 삶을 지탱해 주던 작은 희망이었다.


작은 포도송이 몇 개일지라도, 그것은 땀과 기다림이 응축된 결정체였다.

우리는 종종 남의 손길이 닿아 빚어진 열매의 무게를 가볍게 여기지만, 그 속에는 한 사람의 하루와 계절, 그리고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앞집 할머니의 포도 이야기는 단순한 도둑 사건이 아니다.

타인의 정성과 기쁨을 존중하지 않는 무심함이 얼마나 깊은 상처가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 상처 앞에서 나는 오늘도 되뇐다.

“다른 이의 기쁨을 빼앗는 손이 아니라, 함께 나누는 손길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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