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와 나의 시간

by 비움과 채움

서랍을 열자 낯익은 물건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잠든 듯 멈춰버린 시계들.

손목에서 떠난 지 오래인데도 여전히 그 자리에 모여 있었다.

새삼스레 시계를 꺼내 들여다보니, 단순히 시간을 재던 도구가 아니었다.

시계는 내 인생의 순간들을 함께 지나온 동반자였다.


결혼식 날 손목에 걸었던 시계, 긴장과 설렘이 뒤섞였던 순간이 그 작은 원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듯했다.

언제 사라졌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날의 심장이 뛰던 박동만큼은 여전히 또렷하다.

전자시계는 학창 시절과 청춘의 한가운데 있었다.

시험 시간마다 초침이 가리키는 숫자에 마음을 졸였고, 친구들과 수영장에 뛰어들 때 물방울 속에서도 묵묵히 시간을 지켜주던 작은 기계였다.


해외여행에서 충동적으로 사들였던 시계는 낯선 거리를 헤매던 기억을 품고 있다.

언어가 불편하던 나라에서도 시계를 들여다보며 약속 시간을 맞추며 긴장했던 시절도 떠오른다.

박사학위를 마친 친구가 건네준 시계는, 그의 웃음과 함께 내게도 작은 자부심이 되었던 선물이었다.

회갑을 맞아 내 손목에 채워준 시계는, 그 자체로 나이 듦은 의미를 깨워 주었다.


그렇게 하나하나의 시계는 저마다 다른 목소리로 내 삶의 장면들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스마트폰이 등장하면서 이들은 서서히 존재감을 잃었다.

주머니에서 꺼낸 휴대폰 화면 속의 시간은 언제나 정확했고, 일정도 알람도 더 친절하게 알려주는 비서가 되어있다.

손목은 가벼워졌지만, 시계와 함께했던 시간의 온기마저 가벼워진 건 아닐까.


한때는 고급 시계를 차야 멋있어 보인다고 믿었던 때도 었었다.

왼팔을 들어 보이며 은근히 과시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허세였음을 알지만, 그 허세조차도 젊음의 한 장면이었다.

지금은 시계 없이도 불편함이 없다.

하지만 서랍 속에서 잠자고 있는 시계들을 보면, 마치 내가 잊고 있던 과거의 조각들이 하나씩 깨어나는 듯하다.


서랍을 닫고 일어서자 벽시계가 묵묵히 말한다.

“나는 아직 잘 돌아가고 있지.”


순간, 멈춰 선 것처럼 보였던 시간들이 다시 흐르기 시작한다.

손목 위에서 사라진 시계들은 여전히 내 기억 속에서 살아 돌고 있다.

시계는 단순한 물건이 아니다.

그것은 내 지난날의 궤적이자, 시간을 살아낸 나 자신을 비추는 거울임이 분명하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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