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의 과거와 현재

by 비움과 채움


점심을 마치고 선배님은 청계천을 걷자고 하셨다.

익숙한 산책 제안처럼 들렸지만,

청계천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그의 걸음은 조금 느려졌고,

눈길은 물이 아니라 시간을 더듬고 있었다.


“자네, 이 개천 위에 고가도로 있었던 거 기억하나?”


그 질문 하나로

청계천의 물길 위에

콘크리트와 먼지, 매연의 풍경이 겹쳐졌다.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기억,

그러나 누구에게나 같은 무게는 아닌 기억이었다.


선배님의 이야기는

책 속 연표가 아니라

살과 땀, 그리고 상처의 언어였다.

개천이라 불리던 시절,

아이들이 물장구를 치고

빨래가 흘러가던 생활의 중심.

그러다 전쟁 이후 몰려든 사람들,

판자촌,

악취,

복개,

고가도로.


“그땐 말이야,

하루를 산다는 게 그냥 버티는 거였어.”


70년대 청계천 사람들.

넝마를 줍고,

신문을 팔고,

지게를 지고,

우산을 팔던 사람들.

그 이름조차 기록되지 않았던 삶들이

청계천의 양쪽에서

물보다 먼저 흐르고 있었다.


강제 철거 이야기에 이르자

선배님의 목소리는 잠시 멈췄다.

광주대단지로 쫓기듯 밀려나던 사람들,

떠나야 했던 골목,

무너진 집보다 더 크게 무너졌던 마음.

그 시절을 말하는 그의 눈가에

시간이 고였다.


그런데도

왜 다시 이곳을 걷자 하셨을까.


“보고 싶지 않은 기억인데…

그래도 오게 된다네.”


그 이유는 의외로 담담했다.

가난했지만,

사람이 있었던 곳.

배고팠지만,

정이 돌던 골목.

미역을 감고,

판잣집 사이를 뛰어다니던

어린 시절의 놀이터가

이렇게 살아 돌아온 것이

그저 고맙다는 말이었다.


지금의 청계천에는

왜가리가 날아들고,

청둥오리가 헤엄치며,

잉어와 피라미가 물속을 가른다.

고층 빌딩 사이로 흐르는 물길은

서울의 자랑이 되었고,

사람들은 발을 담그며 휴식을 즐긴다.


나는 걷고,

선배님은 기억을 걷는다.

같은 길 위에서

서로 다른 시간을 밟는다.


청계천은 단지 복원된 하천이 아니라

덮였던 삶이

다시 햇빛을 본 자리다.

없애고 덮는 것으로는

사라지지 않던 기억들이

이제는 물처럼 흐르며

도심 한가운데 숨 쉬고 있다.


선배님은 말없이 물을 바라보고,

나는 그 옆에서 생각한다.

발전이란 무엇인가.

지워버리는 것이 아니라,

기억할 수 있게 만드는 일은 아닐까.


청계천은 오늘도 흐른다.

과거를 데리고,

현재를 적시며,

다음 세대에게

이 도시가 지나온 시간을

조용히 들려주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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