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숭아꽃과 누님의 기억

봉숭아꽃은 매니큐어였다

by 비움과 채움

울타리 곁마다 흐드러지던 봉숭아꽃.

그 앞에 서면 어린 날의 풍경이 눈앞에 다시 그려집니다.


누님은 꽃잎을 조심스레 따서 바구니에 담곤 하셨지요.

나는 그 옆에서 작은 손으로 따라 따며 보탰습니다.

줄기와 잎, 꽃잎이 한데 어우러져 백반과 소금과 함께 절구에 빻아질 때면,

붉은 즙이 번져 나오던 그 순간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누님은 그 반죽을 손톱 위에 곱게 올리고,

투명한 비닐을 감고는 고무줄로 단단히 묶었습니다.

나는 옆에서 숨을 죽이며 지켜보았던 기억이.

누님의 눈빛에는 작은 설렘과 큰 기대가 번져 있었습니다.

그 순간의 누님은 동네에서 제일 아름답고고 예뻤습니다.


밤새 묶어둔 손가락을 이튿날 풀어낼 때,

분홍빛 물이 은은히 배어난 손톱을 펼쳐 보이며 환하게 웃던 누님.

그 웃음은 꽃보다 고왔고, 어린 동생의 눈에도 빛나 보였습니다.

그날 누님은 동네 처녀들을 불러 모아 자랑했지요.

나는 그 곁에서, 그 환한 얼굴을 바라보며 괜스레 뿌듯했습니다.


옛사람들은 붉은 물이 사악한 기운을 막아준다고 믿었다지요?

그러나 내게 그 색은, 단순한 벽사가 아니라

누님의 소녀다운 꿈과 기쁨, 그리고 아름다움의 상징이었습니다.


봉숭아꽃은 누님에게는 화려한 매니큐어였고,

나에게는 누님의 웃음을 오래 남겨준 계절의 선물이었습니다.

세월이 흘러도, 그 붉은 빛깔은 여전히 내 마음속에 물들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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