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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일제문소 May 03. 2021

2020년 총결산

새해에는 장항준 감독처럼 살기

크리스마스다. 백수의 시간은 주중이든 주말이든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에 별 감흥이 없다. 어제 가족들과 회를 맛있게 먹었고, 마무리 초코케이크에 달밤에 체조까지 완벽하게 마무리를 하고 <브리짓 존스의 일기2>를 보다 잠들었다. 책이든 영화든 같은 것들을 여러 번 보지 않는 편인데 이상하게 브리짓 존스 시리즈는 봐도봐도 재미있다. 멋있는 콜린 퍼스 때문인가. 나에겐 <나홀로 집에>처럼 크리스마스에 늘 틀어놓는 시즌 무비 느낌이다.


원래는 트이타에서 올 한 해를 정리하는 표 이미지 같은 걸 다운받아서 한 번 해보려고 했다. 그런데 야심차게 이미지를 ppt에 얹어보고 귀찮아서 때려쳤...하지만 시간이 많이 흘러 돌아봤을 때 2020년은 나에게 분기점이 될만한 한 해가 될 듯하여 그래도 좀 정리를 해보기로 했다. 잘 생각도 안나는 크게 의미없는 해로 남아도 상관없다. 뭐가 되었든 나는 분명히 삽질을 했을 것이고, 뻘짓은 더 많이 했을 것이고, 나중에 보면 재밌을 거다. 내가 토크박스 나갈 것도 아니지만 누가 그러던데. 눈물 닦고 나면 다 에피소드라고! 


1. 올해의 사건 - 회사를 다니지 않게 된 일

'회사를 다니지 않게 된 일'이라고 하니까 너무 담백해보이는데? 그런데 굳이 '권고사직을 당한 일'이라고 쓰고 싶지도 않다. 사실 회사를 다니고 안다니고 그 팩트가 중요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그것은 계기였고 돈을 벌어서 생계를 이어나가는 것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을 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정말 극한의 상황이 아닌 이상 내가 매달 따박따박 들어오는 돈을 마다해가며 이런 시간을 갖는 건 정말 쉽지 않은데 반강제로 주어진 셈이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는지에 대한 추궁보다는 이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미래를 위해 쓸지 생각하려 노력중이다.


2. 올해의 사람 - 나의 팀원들

나름대로 어려운 시간을 보내다보니 고마운 사람들이 많은데 올해는 나의 팀원들 덕분에 버텼다. 이제는 팀장, 팀원 관계도 아니고 그냥 술친구가 되어버렸지만 회사를 나올 무렵, 이 친구들이 없었으면 나는 더 빠르게 무너졌을 것이고 회복도 어려웠을 것이다. 첫 팀원이라는 애틋한 마음을 걷어내고 보아도 너무나 역량이 뛰어난 친구들이었기 때문에 아쉬움도 크다. 더 많은 일들을 재미있게 잘 해볼 수 있었는데 그럴 기회가 더 주어지지 않은 게 너무 아쉽다. 그래서 언젠가 꼭 한 번은 다시 함께 일을 해볼 기회를 도모해보려 한다.


3. 올해의 장소 - 한강

올해 산을 많이 다녀서 한라산, 지리산 등을 떠올려보기도 했지만 결국은 한강이다. 하염없이 걸었다. 10년이 넘도록 회사-집이라는 축을 중심으로 살았던 사람에게 갈 회사가 없다는 것은 큰 스트레스일 수도 있지만 한강이 있어서 버텼다. 처음에는 살금살금 가까운 반포대교까지 가다가, 잠수교 건너 이촌까지 가보고, 노들섬까지 가보고, 이제는 양화대교에서 집까지 걸어오는 경지에 이르렀다. 코로나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운동하러 나오는 곳이긴 하지만, 아마 한강은 그 누구보다도 내 마음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많은 생각과 마음을 한강에 흘려보냈다.


4. 올해의 맛집 - 을지로 보석

처음엔 연예인들이 너무 가길래 그냥 뭐 그렇겠지 하고 시큰둥했다가 김유리의 불꽃예약으로 가보게 되었다. 지금은 내추럴와인에 한식을 페어링하는 곳이 꽤 많이 생겼지만, 그때만 해도 그동안 경험해보지 못한 진짜 개성있고 세련된 맛으로 느껴졌다. 처음의 강렬함 때문인가 요즘도 맛있는 집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른다. 그리고 맛에서 조금 밀리긴 했지만 최근에 가본 '옥앤수'는 분위기 맛집이다. 맛은 뭐 그렇게 대단할 게 없는데 오픈된 주방부터 다찌형 테이블, 창틀, 식물까지 무엇 하나 거슬릴 게 없었다. 내가 딱 모든 게 적당하다고 느끼는 정도의 밸런스를 가진 곳은 처음인 듯하다.


5. 올해의 책 - 나무의 시간

배우들이 연말 시상식에서 상 타려면 연말에 히트작을 내야 한다고 하는 건가. 뭐 되게 열심히 읽었는데 역시나 생각나는 것은 최근에 제일 재미있게 읽은 책. 돈 주고 에세이를 사서 읽을 때, 그렇게 막 뿌듯한 느낌을 가질 때가 별로 없는데 오랜만에 '아, 이 정도면 돈값하네'하는 생각이 들게끔 하는 책이었다. 나무에 대한 지식은 물론이거니와 나무로 바라보는 세상에 대한 통찰도 너무 멋졌다. 그리고 노력과 세월로 누적된 안목이 절로 느껴져서 정말 좋았다. '고급 에세이'로 분류하고 싶다. 자기의 일에 대해서 이 정도 쓸 수 있는 사람만 에세이 낼 수 있도록 법으로 좀 정해줬으면 좋겠다.


6. 올해의 영화 - 찬실이는 복도 많지

코로나 때문에 극장이 텅텅 비었지만 밖에서 나만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 꽤 소중했던 나는 그래도 나름 시네마열사로서의 본분을 다했다. 그 첫 번째 영화가 '찬실이는 복도 많지'였다. 이런 어려운 시절이 아니었으면 더 잘 되었을 영화인데 내가 다 안타까웠지만, 그래도 이 영화의 가치를 알아봐주는 사람들이 꽤 있어서 정말 좋았다. 나도 열심히 홍보하고 다녔다! 나는 막 멋있는 위치에 있지는 않아도 한 개인으로서 품위를 지키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의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따라가다보면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가 보인다. 나도 찬실이 같은 사람이면 좋겠다. 다만, 찬실이보다 쬐금만 더 부자였으면...


7. 올해의 아쉬움 - 없음

이것도 분명히 있었을 텐데...최근 크게 아쉬움을 느낀 게 없어서 그런지, 스스로 그렇게 느껴야 편하니까 최면을 걸어버린 것인지. 아무튼 이 글을 쓰는 시점에는 딱히 없다. 작금의 상황에서 지금 같은 건강한 멘탈을 유지하는 것도 나는 스스로에게 대단히 감사하고, 가족을 비롯한 사랑하는 사람들이 무탈한 것도 감사하다. 뭔가 또 내 인생의 큰 싸이클이 한 바퀴 돌면 좋은 일이 있겠지. 돌아보면 늘 나쁜 일만 있지도 않았고, 늘 좋은 일만 있지도 않았다. 그리고 올해의 아쉬움을 무엇이라고 정의한다고 한들 달라지는 게 없어서 굳이 짚고 싶지도 않다. 아쉬움 없음!


8. 올해의 수확 - 잊고 넘기는 법을 알게 된 것 

나는 너무 많이 느끼고 너무 많이 기억하는 사람이다. 이것이 나의 특징인 걸 잘 모를 때는 세상 사람들이 나 같지 않음에 너무 많이 힘들어했다. 공감을 기대하고 반응을 예상하다 실망하고 지쳤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는 사람에게 큰 기대를 하지 않는다. 자연히 실망할 일이 줄어든다. 그리고 실망스러움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 다가올 때는 바로 운동복을 챙겨입고 나간다. 지나가는 감정이라는 것 또한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내가 걷는 것인지 내 다리가 걷는 것인지 모를 지경이 되면 그런 감정들은 또 언제그랬냐는 듯 사라져간다. 운동에 돈을 때려박아가며 몸을 움직이는 것의 소중함을 스스로 깨우친 것이 이렇게 어려운 시기에 빛을 발했다.


9. 올해의 고마움 - 가족

모두가 그렇겠지만 가족은 마음의 가장 깊숙한 곳을 기쁘게 하기도 하고 울리기도 한다. 나 역시도 그랬다. 하지만 지난 몇 년 간 서로 간의 거리조절에 힘쓴 덕분인지 이전보다는 확실히 나아짐을 느낀다. 물론 내가 덜 민감해진 것도 크다. 백수인 나도 나지만 동생의 귀국과 재택근무로 인해 다 늙어서 식구들이 함께 보내는 시간이 엄청 많아졌다. 다 큰 성인 4명이 머물기에 좁은 공간이라 약간의 불편함은 있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잘 버텨내고 있다. 모든 시간에는 이유가 있으니 이 시간에도 이유가 있겠지. 어차피 이렇게 보내게 된 거 새해에도 화이팅!


10. 내년의 기대 - 인생은 장항준처럼

누구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을 살면서 해본 적이 없는데 최근 장항준을 보면서 '아, 난 저렇게 살고 싶다.'라는 생각을 진지하게 해봤다. 나랑 너무 대척점에 있는 사람이라 그런 것일까. 50이 다 되어가는 나이에 어떻게 저렇게 구겨진 흔적이 없을까. 김은희가 잘 벌어서일까. 오은영 선생님도 너무 비장하게 살지 말랬는데. 내년 목표는 장항준처럼 좀 라이트하게 살아보는 거다. 매사 최선을 다한다고 애는 썼는데 나의 지난 날을 돌아보니 숨쉴 틈이 하나 없다. 그렇다고 뭐든 숨막히게 잘한 것도 아니면서! 내년엔 누군가가, 어떤 일이, 나에게 쉽게 들어올 수 있도록 공간을 좀 두는 연습을 해보려고 한다. 그리고 즐거움을 구하되 좋아하는 것에는 아낌없이 마음을 쏟아야지.


2021년은 소띠해라고 한다. 십이간지가 벌써 세 바퀴나 돌았다. 언제 이렇게 나이를 먹어버린 것인가. 요즘 나 스스로가 약간 돌아버린 건가 싶을 정도로 긍정적인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새롭게 주어지는 하루가 선물 같이 느껴진다거나 딱히 손에 잡히는 것도 없는데 뭔가 어떻게든 풀릴 것 같다든가. 예전의 나라면 이런 생각 자체를 두드려팼을 텐데 지금은 낯설게 눈치보며 은근히 누리고 있다. 내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울의 그림자가 드리웠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이다. 나는 내가 더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최선을 다해서 나에게 더 좋은 것을 많이 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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