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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소 Jun 16. 2021

공간

아카시아 꽃잎의 추억


"민호야 오늘 학교 끝나고 저번에 갔던데 거기 또 가자~"

"어디? 그.. 무서운 할아버지네?"

"응"

"알았어.. 근데 나 오늘 청소야.. 조금 기다려 줘"


오늘은 토요일이라 4교시가 끝나면 학교가 모두 파한다

청소를 대충 끝내라고 민호에게 눈치를 주며 몇몇 친구들을 이미 불러 모아 복도에 진을 치고 있었다


민호네 반 반장인 한준이가 교무실에 가서 선생님께 청소 검사를 마치고 뛰어 들어오며 민호에게 실없는 농담을 건넨다

"야~민호야 선생님이 너만 남고 다 가래~"

"웃기시네~"

민호는 반장 말이 뻥이란 걸 이미 눈치챈 듯 한준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책가방을 들러 맨체 벌써 학교 계단을 후다닥 뛰어내려 가고 있었다



지난주에도 갔었던 마을 뒷동산엔 나무 밑동이 어린아이 혼자 두 팔로 감싸기엔 부족할 정도의

큰 아까시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기형적으로 옆으로 자란 나무는 하늘을 향해 자라지 않고 뿌리를 땅에 박은 체 기억자 모양으로 자라 있었다

언덕 아래쪽에서 바라보면 학교 2층 높이는 돼 보였고 누가 매어 놓았는지 나무 중간 부분엔 굵은 밧줄이 하나 묶어져 있어 타잔 놀이를 하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나무 아래엔 호랑이 할아버지가 작년 벼농사를 짓고 바짝 말려 놓은 볏단이 높은 나무 위에서 뛰어내려도 다치지 않을 만큼 쌓여 있었다

오늘도 호랑이 할아버지만 없다면 엄청난 재미가 있을 거란 기대감이 아이들 발걸음을 가볍게 한다



5월의 들녘은 지천에 널린 봄 꽃들로 동산으로 향하는 길목이 비단을 깔아 놓은 것만큼 아름다웠다


산길을 따라 얼마나 올라갔을까 저 멀리에 커다란 아까시나무가 보인다

멀리서 보이는 커다란 아까시나무는 주렁주렁 열린 꽃잎이 가느다란 나뭇가지가 무게를 못 이기고 축축 쳐져 있었다

이때가 아까시나무에 열리는 달콤한 꽃잎을 맛볼 수 있는 절호의 시간임을 말 안 해도 친구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푸릇푸릇한 초록잎과 몽글몽글 포도송이처럼

열린 꽃잎이 얼마나 많이 피었는지 나무 반쯤이 하얀색 꽃잎으로 뒤덮여 있었고

멀리서 보면 마치 튀겨 놓은 팝콘을 나뭇가지에 붙여 놓은 듯했다


아까시나무 (사진출처 국립산림과학원)


나무 근처에 다다르자 누가 먼저 그랬냐는 듯 서로가 밧줄을 차지하기 위해 뛰기 시작했다

책가방과 신주머니는 여기저기 내동댕이 쳐져 뒤 섞여 있었고 함께 따라온 마음씨가 착한 미숙이는 나뒹굴어진 친구들의 가방을 한쪽으로 나란히 정리해 주었다


"조심해 그러다 다쳐"

미숙이가 장난이 심해 항상 여기저기 상처가 많은 종만이에게 걱정하듯 소리친다

1년 내내 동전만 한 땜통 하나쯤 훈장처럼 머리에 달고 다니던 종만이가 외나무다리를 건너듯 양팔을 벌려 균형을 잡아가며 기어코 나무 끝까지 다 달아 포도송이만큼 커다란 아까시나무 꽃잎 한송이를 따왔다


"자 먹어봐~"

"내가 그지냐 더러운 꽃 잎을 왜 먹어?"

"어어 얘 봐라.. 이게 왜 더럽냐? 얼마나 맛있는데"

콧물을 훌쩍이며 종만이가 그럼 됐다는 듯

아까시꽃 잎을 한 손으로 후드득 훑어 한 입에 털어 넣는다


"맛있냐?"

종만이 먹는 모습을 미간을 찡그린 체 바라보던 미숙이가 궁금한 듯 물어본다

입에 들어간 아까시꽃 잎을 한참을 꼭꼭 씹어 단물만 삼키고 꽃 잎은 뱉어내며 고개를 끄덕인다

"응 맛있어 너도 먹어봐"


다른 친구들도 아까시꽃 잎을 따느라 정신이 없어 보인다

민호는 꽃 잎 송이 윗부분을 잡고 목을 뒤로 젖힌 체 아까시 꽃 잎을 목구멍을 향해 입으로 집어넣는다

그리곤 입술을 다문체 꽃잎만 그대로 입속에 남겨두고 줄기를 쏙 뽑아낸다

민호 역시 한참을 씹고 나서야 단물 빠진 꽃 잎을 뱉어냈다

장난기가 발동한 종만이가 아까시꽃 잎을 훑어내어 알갱이만 신주머니에 한가득 담아 앉아있던 미숙이 머리에 뿌린다

꽃비를 잔뜩 맞은 미숙이가 벌떡 일어나 종만이를 쫓아갔지만 꽃 비를 맞은 미숙이도 그리 기분이

나쁘지 않은 듯 이내 발걸음을 멈추고 떨어진 꽃 잎을 주워 흩뿌리듯 종만이에게 던져본다


우리는 그렇게 모여 앉아 한동안 아까시나무 꽃 잎을 따먹으며 한참을 웃음꽃도 함께 피웠다



naver

타잔 놀이를 하느라 흩어졌던 짚 단을 주워다 담을 쌓고 지붕을 만들었다

어느새 아늑한 네모 모양의 아지트가 완성되었다

네다섯 명이 들어가 앉아 있기에도 충분한 공간이 포근함을 안겨준다

머리엔 볏짚 부스러기가 털어내어도 떨어지지 않을 만큼 묻어있고 여기저기서 퉤퉤 거리며 입속으로 들어간 볏짚을 떼어내기 바빴다


아까시나무 사이를 뚫고 엉성한 볏짚 지붕 사이로

한줄기 햇살이 들어왔다

먼지가 쉴 새 없이 햇살을 따라 하늘 위로 올라간다

눈이 부신 듯 얼굴을 찡그린 미숙이가 가만히 있어야 먼지가 사라진다고 했다

우리는 그렇게 한참 동안을 말없이 앉아 있었다

휘휘 저어 놓은 어항 속 흙탕물이 맑아지기를 기다리듯...






넥타이가 잘 어울리는 종만이의 모습에서

땜통을 긁적이며 콧물을 닦아내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그때도 키가 작았던 민호는 지금도 친구들 중 키가 제일 작다

그렇게도 땅에 떨어진걸 잘 주워 먹던 한준이는 오랜 고생 끝에 기어코 유명한 셰프가 되었다

약간은 실망스러운 외모의 미숙이도 한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있다


"다들 모인 거냐?"


작은 호프집을 하고 있는 수용이가 맥주를 따르며

"내가 너보다 더 먹었을걸?"


"뭐라고?"


"쟤 지금 뭐라는 거냐?"


술기운이 올라온 수용이가 맥주를 따르다 말고

목이 매이는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그때 말이야...

그때 그.. 아카시아꽃을 아마.. 꿀 따러온 벌 보다

내가 더 많이 먹었을 거라고"


행복했던 옛날 생각에 수용이가 목이 매였나 보다


"그래.. 그땐 그랬지

오염 안된 아카시아 꽃..."


"근데.. 너네 그거 알아?

우리가 먹었던 그 꽃이 아카시아가 아니고

아까시나무 꽃인 거.. 너네 몰랐지?"


지금 함께 있는 우리는 아카시아꽃이 중요하지 않았다

35년 전 대나무 말을 타며 함께 놀던 13살 꼬마들이 지금 이 자리에 함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중요했다


볏짚단을 두 겹으로 차곡차곡 새워 벽을 쌓고

지붕을 얼기설기 섞어 만든 아지트

무릎을 땅에 대고 작은 틈을 통해 엉금엉금 기어 들어가면 엄마 품속만큼 아늑했던 공간...

한줄기 굵은 햇살 사이로 뿌옇게 피어오르던 먼지...

흙냄새... 먼지 냄새... 볏짚 냄새...


35년이 지난 지금

그때 그 한 공간에 있었던 사람은 같지만

그때의 그 아늑했던  볏짚 안 공간이 그립다




13살 소년의 그때 그 순수함은 볏짚 속에서 나와 함께 나오지 못한 듯하다

모든 이들이 과거를 그리워하는 건

순수했던 그때의 나를 그리워하기 때문 아닐까?


세상 살기가 각박하다고.. 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누군가를 제쳐야 한다고..

그렇게 세상이 날 변하게 만들었다고.. 변명하고 싶지는 않다


우린 가끔 잊고 있지만 모두가 어둠 속에서 넘어지며 살아간다

갑자기 불을 켜 주위를 둘러보면 탓할 것들 투성이다

하지만 누구나 그것들을 탓하며 살진 않는다


그때의 그 순수했던 나를 다시 찾을 수 있다면

그때의 그 공간으로 한 번쯤은 돌아가 보고 싶다


어항 속 흙탕물이 맑아지기를 기다리는데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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