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리스 레싱 + 에드워드 호퍼 = 누구에게나 19호실이 필요하다
7. 도리스 레싱(19호실로 가다) + 에드워드 호퍼(아침햇살)
= 누구에게나 19호실이 필요하다
작가에게 있어 첫 문장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나도 조금 끄적거려보니 절실하게 느끼게 된다. 시작을 어떻게 풀어가느냐에 따라 전체 스토리의 성공여부가 결정될 정도라고 하니 작가들에게 얼마나 크나큰 숙제일지 생각하니 벌써 첫 문장에서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진다. 그래서 작가들이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을지 생각하면서 여러 번 읽어보게 된다.
도리스 레싱의 단편 <19호실로 가다>는 “이것은 지성의 실패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롤링스 부부의 결혼 생활은 지성에 발목을 붙잡혔다.”로 시작되어 우리의 시선을 끈다.
수전은 멋진 남편과 사랑스러운 아이들과 아늑한 집에서 얼마든지 상류층의 행복을 즐기며 살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결혼과 일상 속에서 희미해져 가는 자신의 존재를 붙잡기 위해 단란한 일상을 포기한다. 자기 자신을 찾아 19호실 초라한 호텔방에서 머물어 잠깐의 자유를 느껴보지만 결국 자신을 둘러싼 조여오는 압박에 영영 이 방에서 나가지 못하고 만다.
과연 수전을 이렇게 19호실에 가두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도리스 레싱은 단호하게 말한다. 당시 20세기 여성들의 자유를 억압하는 사회적 통념인 남성중심 사회, 가부장제의 압력과 그것은 여성으로 하여금 ‘자신의 것’을 갖지 못하게 하며, 대신 엄마와 아내, 조력자의 위치에 머물게 하는 상황들을 이해하지 못하면 이 소설을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이 소설 초반에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는 "지성, 이성, 분별력, 완벽한, 균형, 현명"이다. 왠지 이런 반복적인 단어의 나열이 우리의 숨을 쥐어오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이들 매튜와 수전 부부의 시작은 어떠했을까? 어떻게 이들의 관계는 변질되었으며, 수전은 왜 19호실을 가게 되었을까?
매튜와 수전은 이성적인 끌림으로 결혼을 했고, 이들은 선견지명과 현실적인 분별력을 갖추고, 현실적인 성공도 한 완벽해 보이는 가정을 꾸렸다. 큰 저택에서 아이들 4명을 건사하며 “모든 것이 매끄럽고 흠잡을 데 없이 굴러갔다.”(p.279/문예출판사)고 한다. 이들 부부를 지켜보는 주위 사람들의 시선은 “두 사람이 언제나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이 옳은 길만을 선택하는 감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균형 잡히고 현명한 가정 생활을 누리는 것도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들 부부를 흔들리게 한 것은 이것조차 미리 예상한 그대로 어쩔 수 없이 단조로운 생활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들 부부의 중요한 끈은 아이들이 아닌 부부의 사랑이 삶의 중심이자 원천이라는 그들의 단호한 믿음이었다. 수전은 자신의 독립성을 위해 다시 직장을 구하기보다는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랄 때까지는 엄마가 필요하다는 데에 매튜와 동의한채 전업주부로서 가사와 육아를 담당하게 된다. 이들의 부부를 흔들었던 단조로운 생활은 그들 서로에게 전부가 될 수는 없게 만들고 결국에는 매튜는 자신의 외도를 창피해하면서 고백한다.
수전은 용서가 아닌 그럴 수 있다고 이해하고 넘어간다. 이렇게 대범한 그녀라니. 이 대목에서 이미 수전에게 매튜와 관계의 균열이 깨져버린 게 아닐까. 이런 일로 매튜와 진부해지고 싶지 않았기에 이성은 이해하지만 마음으로는 용서할 수 없는 불일치의 감정에 빠져 버린다.
수전은 이렇듯 자신의 지성에는 여전히 문제가 없지만, 점점 자신이 인생이 사막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집안에 많은 손길이 필요한 집과 네 아이 때문에 많은 대가를 치러야 하는 사실에 책임감만 쌓여간다.
그녀는 막상 막내 쌍둥이들이 학교에 들어가 확보된 길어진 자유시간을 보낼 계획을 세웠지만 그간 너무 오랫동안 자기 자신의 마음을 얼음상자에 방치한 것일까?
수전은 자신의 마음 상태를 자신도 자각하지 못한 채 자신이 아름답게 가꾼 집에 들어가기 싫다는 사실만 되새긴다. 집 안에서 온전한 자신을 위한 자유를 누리지 못한다. 가족들로부터 시간의 압박을 받고 가사와 육아의 당위성이 부과된 채 묶여 있는 삶을 머물러 있을 뿐이다.
수전은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완전히 혼자가 되고 싶어 초라한 호텔방 19호실의 낡은 철제 침대에서 익명의 존재가 된 그 순간을 소중하게 여긴다. 이해받지 못할 말들을 누군가와 나누기 보다는 혼자의 시간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침묵의 시간을 온전히 보낸다. 모든 관계로부터 탈피해 자신만이 통제할 수 있는 온전한 자유를 누린다. 그러나 충만한 행복이 느껴지지 않아 보인다.
이마저도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남편과 쌓아온 지성과 이성의 벽은 결국 이들을 이 소설의 첫 시작처럼 지성의 실패로 끝나게 하고, 매튜에게 19호실의 정체가 드러나게 되면서 더 이상 자유의 공간이 아닌 억압의 공간이 되어 버린다.
수전은 가정에서조차 자신의 위치를 찾지 못하게 되고 19호실이 자신의 온전한 공간이 아니게 되자 그녀는 이 공간에 영영 나오지 못하게 되는 비극을 맞이한다. 단지 20세기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서 그런지 단전에서부터 씁쓸한 감정이 밀려온다.
여성들의 개인적인 공간에 대한 욕구는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을 통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현실적으로 부딪히는 여러 장벽들 때문에 아직도 많은 여성들이 있는 그대로 자신을 찾기 위한 공간을 소유하기가 쉽지 않다.
홀로 19호실에서 고독에 잠겨 있는 듯한 수전의 모습을 상상하다보니 에드워드 호퍼의 <아침햇살>이라는 그림이 생각난다. 아침햇살을 맞이 하고 있는 여성의 표정은 그리 밝지만은 않다. 새 아침이 밝았지만 그녀에게 주어진 여러 역할과 관계의 압박으로 오늘 하루를 어떻게 버텨야할지 삶의 무게를 되뇌이고 있는 듯하다. 에드워드 호퍼는 고독의 화가로 불리는데 그의 작품은 그만큼 현대인의 채워지지 않는 내면을 탁월하게 그려내며 우리 스스로를 차분하게 돌아보게 한다. 아침의 따뜻한 햇살을 받고 있는 이 여인은 왜 이리 외로워보일까?
이 에드워드 호퍼의 <아침햇살>의 여인과 <19호실로 가다>의 수전은 자발적 고독을 선택했다. 수전도 이 여성처럼 혼자 주어진 공간에서 무언가를 해야한다는 강박보다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자기의 상처받은 영혼을 돌아보고 싶었던 건 아닐까. 그녀는 너무나 무기력해진 상태라 힘들게 주어진 공간에서 무언가 효율적인 일을 해내야 한다고 스스로를 밀어붙이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에게 허릭된 소중한 시간과 공간조차도 그녀를 움직이게 하는 힘이 되어주질 못하니 어떻게 그녀를 위로해줄 수 있을까? 그저 감싸 안아주고 싶다.
아직 "자기만의 방"을 확고히 고수하지 못한 나도 정처없이 뜨내기 식으로 조용한 카페를 여기저기 찾아 다니고 있다. 끝나지 않는 가사와 아이들의 엄마에 대한 기대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오로지 나로만 존재하는 시간은 하루에 단 2~3시간밖에 주어지지 않는다. 이 시간이 내게 얼마나 소중한지 읽고 싶은 책들을 펴놓기만 해도, 미술관 입장 마감시간 직전에 발만 들여놓아도 너무나 달콤하게 느껴진다. 아마도 수전도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이 시간에 그저 멍하니 쉼만 가져도 그녀에겐 의미 있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더불어 똑똑한 지성인임을 자부하며 앞만 바라보며 완벽한 삶만을 추구해온 수전에게 완벽하지 않아도, 지극히 인간적인 감정을 표출하고 살아도. 지성을 약간 내려놓아도, 충분히 살만한 세상이라고 위로해주고 싶다.
오히려 이 세상은 감정을 통제한 채 이성으로만 이 세상을 살아가기엔, 지성의 힘으로만 버티기엔 우리 자신이 피폐해질 수 밖에 없다고 조언해주려고 한다. 완벽하지 않은 세상에서 우리의 부족함을 수용하면서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고 그저 노력하는 것도 살아갈 만하다고. 그래도 매일 새로운 아침 햇살이 늘 우리를 환하게 비출 거라고 수전에게 건내주고 싶다.
있는 그대로 살아갈 수 없는 현실을 쓸쓸하게 홀로 견뎌내지 말고 공감해줄 수 있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다시 자신의 위치를 찾아가라고, 우리에게도 언젠가는 우리를 넉넉히 품어줄 19호실이 생길 거라고, 곧 세상이 변하게 될 것이라고 조금만 견뎌보라고 그녀의 손을 잡아 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