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 + 에곤쉴레 = 인간 내면의 위선을 육체적 해체로 풀다
9. 카프카(변신) + 에곤쉴레(자화상) = 인간 내면의 위선을 육체적 해체로 풀다
이번 코로나 바이러스(2022년8월)를 온몸으로 겪으면서 얼마나 건강에 자만하고 이루지 못할 일 없듯이 거만하게 살아왔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
어느 날 아침 내 몸이 내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고 무기력하게 온 힘이 빠져서 일어날 수도 없는 순간, 내 팔다리들이 아니 나의 모든 것이 벌레의 몸이 되었다면 이 얼마나 황당한 일일까?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카프카의 <변신>에서 그레고리 잠자에게 하루아침에 일어난 일이다. 이 소설에서 벌레가 된다는 초현실적인 장치는 아마도 벌레의 실체가 되었다는 사실보다는 벌레와 같은 본질의 인간이 되었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춰야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카프카는 자신의 책에 이런 벌레의 형상을 삽화로 넣는 것을 거절했다고 한다. 그렇게 하는 순간, 그가 벌레가 되어가는 순간과 신체의 변화를 수용화는 과정, 이로 인한 내면의 갈등, 사람들에게 받은 상처들을 여실히 묘사하는 힘이 절감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우리에게 두려움과 불안, 감정이입을 우리만의 상상력으로 끌어올리도록 한 그의 의지는 충분히 알만하다. 때마침 카프카가 이야기하고픈 벌레와 같은 소외된 인간의 이미지를 너무나 잘 표현한 화가의 작품이 떠오르는데 바로 에곤실레의 자화상들이다. 카프카와 에곤실레가 누군가에게 왜 무용한 존재로 때로는 무기력한 실존으로 외롭게 살아야 하는 인간을 그리게 되었는지 문득 궁금해진다.
카프카가 이야기 하고픈 변신의 주체는 가족의 실질적인 가장으로서 생계를 위해 적성에 맞지 않는 직장 일을 열심히 앞만 바라보며 살아온 그레고리 잠자의 벌레로의 변신만을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가 더 이상 경제력도 없고 오히려 짐이 되는 존재로 둔갑하는 순간 그를 둘러싼 사람들의 냉담한 시선들과 이기적 내면의 모습들이 바로 카프카가 이야기하고픈 변신의 주역들이 아닐까 한다. 특히 그레고리 잠자와 각별한 사이였던 엄마와 누이동생이 그를 더 이상 인격체가 아닌 쓸모없고 쓰레기로 처분해야 할 존재로 취급하는 순간 그가 아무리 인간다운 존엄을 지켜보려고 혼자 발버둥친들 소용없어진다.
아마도 가족들에게 더 이상 필요하지 않는 존재로 낙인이 찍혀 불편한 존재로 남게 된다는 설정자체가 요즘 현대사회에서 점점 가정이 해체되어 가는 사회상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듯 하다.
요즘 TV뉴스에서 험악한 존속살인이나 보험금을 노린 부부 청부살인 등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가족들이 남보다도 못한 사이가 되어가는 건 아닌지 걱정스러워진다.
가정이 사회의 울타리와 안전망으로서 가족원들을 보호해주고 고통을 분담하고, 슬픔과 기쁨을 배로 나누면서 위로와 치유의 자리로 다시 회복되어야 할 것이다.
더불어 우리는 존재만으로도 존중하고 존엄을 받아야 하는 소중한 인격체임을, 그래서 벌레와 같은 무용한 존재가 되더라도 서로가 지켜줘야 할 사명을 갖고 태어난 같은 평등한 인간임을 다시금 떠올리게 된다.
19세기말, 세기말적인 오스트리아 빈의 분위기는 프로이드에 의해 무의식이 발견되고, 클림트에 의해 관능에 눈을 뜨게 된 에곤 실레는 스승인 클림트에 의해 관능적인 성과 본능, 무의식의 세계에 대한 표현의 자유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는 예술과 외설의 경계에 선 관능적인 누드화를 그린 화가로 유명하다. 그의 성과 죽음에 대한 묘사와 탐구에 집착하여 적나라하고 지나치게 노골적인 자화상를 주로 그렸다.
솔직히 그의 누드화는 긴 팔과 다리가 만들어내는 뒤틀리고 불편한 자세를 보여주어 솔직히 아름답고 에로틱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긴 팔과 다리를 꺾어 보고 휘어 보고 하면서 만들어지는 근육의 움직임을 집착하고 끈질기게 관찰하여 그린 것이 매우 독보적이다. 그는 뼈만 남은 실체에 불안, 자만, 공포, 증오, 반항, 우스꽝스러움 등 어쩌면 사람들이 겉으로 드러내기 싫어하고 감추고 싶어하는 추한 감정의 결들을 비틀어서 여실히 드러내고자 하는 실험적인 노력의 결과인 것이리라.
실레가 성과 죽음에 대한 탐구에 집착하게 된 것은 그가 15살 때 매독에 걸려 심각한 정신착란 증세와 발작을 일으킨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실레는 아버지가 정신 이상인 상태에서 불을 질러 집안의 모든 재산을 다 태워버린 모습을 바라보면서 성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 호기심이라는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을 것이다.
에곤실레는 누드화를 그리면서 “나는 인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을 그렸다.”라는 말을 남기는데 아마도 그의 그림을 이해하려면 그가 바라본 사람들의 내면의 빛을 제대로 들여다보아야 할 듯하다.
그는 28세에 죽기 전까지 자신의 내면을 다양한 모습으로 그린 자화상을 100여점이나 남겼다. 어찌보면 나르시시즘에 빠져 자신에 대한 넘치는 자신감과 매력을 여러 장의 자화상으로 표현한 듯하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가 그린 자화상은 하나같이 긴 팔과 다리를 꺾어 보고 휘어 보고 하면서 만들어지는 근육의 움직임을 관조적인 태도로 바라보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다.
자화상 속 등장하는 한 사람, 두 사람 또는 세 사람 이상, 그러나 모두 한 사람으로, 그의 자화상 속 인물은 바로 다양한 자아를 가진 한 사람 자기 자신이다. 그는 타인의 내면을 관찰하고 연구하는 데에 한계를 느껴 자신의 내면을 탐구하기 시작한다. 실레는 불안, 자만, 공포, 증오, 반항, 우스꽝스러움 등 어쩌면 사람들이 겉으로 드러내기 싫어하고 감추고 싶어하는 내면을 비틀고, 꺾이고, 일그러진 모습으로 그려냈다. 이를 통해 자신의 모습을 미화하거나 포장하지 않고 여러 자아로 해체하면서 자신의 본질을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그렇다면 에곤 실레는 자신에게서 자아를 해체해내면서 자신의 어떤 본질을 보여주려고 한 것일가?
어쩌면 그는 어른이 되면서 스스로 옭아 매고, 감추려고 해왔던 욕망이나 수치와 공포의 억압에서 벗어나고자 어른의 가면을 내려놓고, 어린 아이들의 용감한 솔직함과 순수함으로 인간 본연의 추한 모습까지도 여실히 드러내려고 한 것은 아닐까? 에곤실레는 “회화는 그 진실을 보여주어야 한다”라고 말하듯이 자화상에서 이런 내면의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 여러 자아로 해체해내었을 것이다.
가끔 ‘보여지는 자아’와 ‘본질인 자아’,‘이상적 자아’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보여지는 자아’와 ‘본질인 자아’ 내에서도 다양한 자아들이 내면에 숨겨져 있다가 우리가 설명할 수 없는 모순적인 위선의 모습으로 발현된다.실레는 우리가 숨기고 싶어하는 자아들 마저도 겉으로 드러내어 모든 억압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그림으로 말하고 있다.
오히려 카프카의 벌레가 된 그레고리 잠자는 에곤실레가 기뻐 마다하지 않는 나약하지만 위선과 겉치레가 없는 인간 본연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미약하고 때로는 짐이 되는 인간의 실체라도 함부로 다뤄져서는 안되고, 누구나 존중받아 마땅하다는 너무나 당연한 이치를 두 작품의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를 통해 뼈저리게 깨닫게 된다. 우리는 모두 벌레같은 존재이지만 더 나아지기 위해 조금씩 노력할 뿐이며, 어떤 누구도 차별받지 말아야 하는 평등한 존재라는 당연한 진리를 망각하지 말아야겠다. 외모로든 능력으로든, 재력으로든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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