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집 <그대, 거침없는 사랑> -
김용택 시인의 시를 굉장히 좋아한다. 역시 뚜렷한 이유는 아직까지 말할 수 없지만 가장 좋아하는 표현을 말하라면 ‘근사하다.’이다. 김용택 시인의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를 보면 등장하는 표현이다.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이 밤 너무 신나고 근사해요.’
‘근사해요.’라는 표현은 글자 자체로도, 발음 자체로도 낭만적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꼭 종이 위에 인쇄되어 담겨있는 시집을 읽기 위해 인터넷을 찾아보니 이미 절판된 상태였다. 결국, 찾게 된 것은 학교 도서관이었다.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찾으러 서가를 돌아다니는데 제일 마지막 칸 구석진 곳에 놓여있었다. 한참, 아무도 건드리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옛 책은 옛 책만의 감성이 있지 하면서 서가에서 꺼내 들었다. 책의 가격이 3000원이었다. 1992년에 나온 초판본이었다. (2003년에 새로운 표지 디자인과 함께 다시 출판되었으나 이 역시 절판됐다.)
그리고 가장 좋아하는 도서관 창가 자리에 앉아 책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감성에 젖어들고 있을 때, 나를 방해하던 것이 등장했다. 책에 심하게 낙서가 되어 있었다. 아마 결혼식 축시를 준비하시던 분이 열심히 연필로 필기를 해두신 것이다. 열심히 시의 구절들을 보고 분석하시고, 시어에 동그라미 쳐두셨다. 그리고 ‘아침이 새롭다. 옷가게, 꽃도 사고’와 같은 메모들도… 아마 같이 준비하셨던 노래는 윤종신의 ‘환생’ 일 것이다. 그분의 메모를 보면서 그분이 어떻게 결혼식 축시를 준비하셨는지 알 수 있었다. (흔히 요즘 말하는 TMI랄까…) 순간 내 표정이 일그러졌다. 아무리 도서관 책이라고, 아니 도서관 책이라면 더 깔끔히 독서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울컥 화가 났다. 화를 가라앉히고 다시금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근데 이번에 등장한 것은 파란색 수성 사인펜이었다. 연필도 아니고 사인펜이라니……. 시를 읽으며 쉼을 즐기려 했는데, 안식처가 깨진 느낌이었다. (도서관 책에 낙서하지 맙시다!!!)
그 파란 수성 사인펜의 주인은 정말 열심히 이 시집을 읽은 분이셨는데, 시를 읽으시면서 코멘트를 달아두셔서 왠지 그분과 같이 이 시집을 읽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푸른 하늘」이라는 시 밑에는 ‘어느 시가 이보다 절실하랴...’라는 감상이 적혀있었다. 그러다 보니 종종 파란 수성 사인펜의 흔적이 있는 곳을 기다리기도 했다. 그분의 코멘트를 보는 일에 재미가 생기기도 했지만 나의 화는 풀리지 않았다. ‘이렇게 도서관 책을 막 다루다니, 용서할 수 없다!’ 이런 마음이었는데, 약간의 웃음과 함께 그분의 긴 이야기를 볼 수 있는 곳이 등장했다.
시집에는 뒤에 부록처럼 시집에 담긴 평론가분들의 해설이 달린다. 나는 그 해설들을 읽으면서 내가 스스로 채우지 못하고 넘어갔던 부분을 채우기도 하고, 나와는 다른 새로운 관점을 보고 ‘이런 생각도 있구나.’하면서 곰곰이 읽어본다. 그리고 그분은 그 평론가 분과 싸우고 계셨다.
「가르치려고 하는 ‘넘’들은 모든 걸 복잡하게 한다... 이 詩集의 point는 ‘푸른 하늘’이라는 시에 있다. 시인이 말하듯 ‘사랑’은 ‘사랑이라는 땅’은 이성과 논리가 발 내리지 못하는 곳이고 설명이 안 되는 땅인데. 그래, ‘길 없는 땅’에 ‘맨발’을 내미는 게 사랑인데 무슨 얼어 죽을 개인적 사랑과 ‘사회적 사랑’이 엉겨 자빠졌다구...? 씨불탱... 이 따위 글 쓰려면 펜을 뿌샤버려라...」 (써두신 내용 그대로입니다. 속어와 욕설이 있어 조심스럽고 이렇게 공개를 해도 되는 글인지 모르겠지만, 익명이니까. 그리고 이 글을 보고 감명받은 나 같은 독자도 있다는 것을 아셨으면 좋겠다.)
정말 책에 낙서를 하신 게 정말 미웠지만 이러한 글을 보고 잠시 이 분이 이 시집에 담고 계신 마음이 깊으신 것 같아, 그래서 그 화를 주체하지 못하시는 것 같아 웃음이 났다.
그렇지, ‘시’라는 게 마냥 어려운 것이 아니지. 그저 모르겠어도, 그 모르는 감정을 가져가는 것, 또 그저 어느 시어를 보고 느낀 감정이 있다면 그것을 모두 가져가는 것이 시를 읽는 일일 텐데… 나는 그 파란 수성 사인펜의 주인과 어느 정도 마음이 통했다. 어느 누구인지 모르는 분이지만 꼭 같이 읽은 것 같은 느낌, 묘했다.
그리고 정말 오랜만에, 사실 실물로는 처음으로 ‘도서 열람표’를 마주했다. 책을 다 읽고 나니 작은 종이봉투가 붙어 있길래 뭔가 싶어 그 안을 봤고, ‘그러한 것이 있었더라.’ 이야기만 들었던, 예전 TV 방송에서 보았던, ‘도서 열람표’였다. 사실 그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 친구들한테 마구 설명했다. ‘그거 있잖아. 그거.’ 꽤 열심히 찾아봤다. ‘책 뒤편에 그 책을 읽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름을 적어두는 종이’라고 쳤었다. 나올 리가 없었다. 아직도 정확한 명칭은 모르겠으나 그래도 적절한 표현인 것 같다.
그 ‘도서 열람표’에 그 파란 수성 사인펜의 분도 적어두셨다. 필체도 펜도 비슷하니 아마 그분인 게 분명하다. 1999년도에 이 시집을 읽고 적어두신 것을 약 20년이 지난 2018년에 내가 마주했다니 기분이 더욱 묘해졌다. 낙서는 정말 좋지 않은 거지만, 책을 읽으면서 누군가의 코멘트를 받는 것도 좋아하지 않지만, 그날은 좋았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선배의 생각을 엿본 것도 같고, 감정을 읽은 것 같아서 말이다.
시집 <그대, 거침없는 사랑>은 김용택 시인의 시집인 만큼 사랑에 대한 따뜻한 사유가 가득했다. 많은 문장들을 곱씹었고 기억했다. 평범한 단어들을 ‘근사하게’ 만드는 시인의 힘이 정말 기억에 남는 날이었다. 평범한 것을 평범하지 않게 만드는 힘, 그것이 바로 시인 것 같다. 이제 나는 지나가다 마주한 어느 날의 달빛을 보고 '근사하다'는 표현을 떠올리게 됐으니까.
그리고 그 파란 수성 사인펜의 주인의 감정들이 인상 깊었다. 마구 느끼고 마구 표현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나도 그 ‘도서 열람표’에 슬그머니 이름을 적어보았다. 적혀있는 이름들이 다 한문이라서 이어서 한문으로 쓰려다가 망해버렸다. 그래도 정말 기억에 남는 순간이 될 것 같다. 언제 내가 20년 전의 선배가 느낀 감상을 실시간으로 들어보겠는가. 내 또래였을 그의 청춘을 만나볼 수 있었을까. 역시 종이에 적힌 것들은 오래 남는다.
종이에 적힌 것들은 의미뿐만 아니라 그 시절을 담고 있어 참 좋다.
p.s.
이 시집을 2003년 버전으로 도서관에서 빌려 아르바이트하던 곳에서 다시 읽었다. 참 좋아하는 시집이라 중고서점에서라도 구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그와 동시에 파란 수성 사인펜이 자꾸 떠올랐다.
+) 이미 많이 유명하지만 추천하는 시들
별 빛
당신 생각으로
당신이 내 마음에 가득 차야
하늘의 별들이
저렇게 빛난다는 것을
당신 없는 지금,
지금에야 알았습니다.
그대, 거침없는 사랑
아무도 막지 못할
새벽처럼
거침없이 달려오는
그대 앞에서
나는
꼼짝 못 하는
한 떨기 들꽃으로 피어납니다
몰라요 몰라
나는 몰라요
캄캄하게
꽃 핍니다.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이 밤 너무 신나고 근사해요
내 마음에도 생전 처음 보는
환한 달이 떠오르고
산 아래 작은 마을이 그려집니다
간절한 이 그리움들을,
사무쳐 오는 이 연정들을
달빛에 실어
당신께 보냅니다
세상에,
강변에 달빛이 곱다고
전화를 다 주시다니요
흐르는 물 어디쯤 눈부시게 부서지는 소리
문득 들려옵니다.
별 하나
당신이 어두우시면
저도 어두워요
당신이 밝으시면
저도 밝아요
언제 어느 때 어느 곳에서 있든 내게
당신은 닿아 있으니까요
힘 내시어요
나는 힘없지만
내 사랑은 힘 있으리라 믿어요
내 귀한 당신께
햇살 가득하시길
당신 발걸음 힘차고 날래시길 빌어드려요
그러면서
그러시면서
언제나 당신 따르는 별 하나 있는 줄 생각해 내시어
가끔가끔
하늘 쳐다보시어요
거기 나는 까만 하늘에
그냥 깜빡거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