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마리 로랑생 展 - 색채의 황홀>
‘전시회’라는 콘텐츠에 대해 어떻게 적으면 좋을지 가장 오래 고민했던 것 같다. 본 매거진을 시작하면서 다양한 문화 콘텐츠에 다루고자 했던 마음이 있었기에 ‘영화’, ‘책’과 달리 ‘전시’를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하는 생각에 휩싸였다. 결국, 또 내 개인의 이야기를 꺼내보는 시간이 된 것 같다. ‘전시회’를 그렇게 많이 가본 것도, 또 그렇게 적게 가본 것도 아닌, 그저 관람이 좋은 사람의 시선이 가득 담긴 이야기다.
최근엔 전시의 형태도 다양해져서 미디어 아트 등 전시회 내에서 사진 촬영이 자유롭고, 포토존을 따로 설치한 전시회들도 많다. 이는 전시회에서 다루고 있는 매체가 훨씬 다양해지면서 방식이 변화한 것 같다. 서울숲 갤러리아 포레에서 진행됐던 <앨리스 – 인투 더 홀>이나 시즌2 전시까지 이어졌던 <모네, 빛을 그리다>까지, SNS상에서 화제가 된 곳이기도 하지만 직접 가서 경험해보면 관람객들을 특정 콘셉트 안으로, 특정한 장소로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굉장히 SNS에서 인기가 많다면, 평일을 추천드립니다.) 반면, 가장 클래식한 전시들을 많이 하고 유명한 곳은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이 아닌가 싶다. 예술의 전당 내에 여러 전시관들이 존재하기에 여러 테마를 갖추고 있기도 하다. 더불어 ‘국립현대미술관’도 클래식한 멋을 가진 전시를 선보인다.(대학생은 심지어 무료 관람...!) 개인적으로 기대하고 있는 전시관은 ‘M컨템포러리’라는 곳이다. 작년 <Hi! POP>이라는 전시를 선보였는데, 기대 이상의 전시를 보고 와서 너무 좋았다. 최근 트렌드를 이어가면서도 클래식함도 있는 공간이었다. 그래서 M컨템포러리에서 하는 전시들은 앞으로 챙겨 가게 될 것 같다.
이제 전시관 내에서 들리는 셔터 소리가 너무 자연스럽지만, 또 없는 전시회는 그 공간에 오롯이 나만 존재하는 것 같아 좋다. 그래서 전시회에 최대한 애매한 시간대에 가려고 하는 편이다. 평일 오후, 아니면 마감하기 2시간 전쯤... 그렇게 다른 관람객이 많지 않은 전시관을 조용히 걷고 있으면 그 전시의 주인공들이 말을 거는 느낌이다. 자기 자신의 작품들을 통해서 말이다. 또 한 가지, 같이 간 사람이 있다면 한 그림을 보고도 다른 평을 내놓는, 그런 과정이 ‘전시’라는 콘텐츠의 매력이 아닐까 싶다.
오늘 이야기할 전시는 벌써 재작년이 된 2017년에 한가람 미술관에서 진행됐던 <마리 로랑생 展 - 색채의 황홀>이다. 본 전시는 활동 중인 문화 웹진의 문화초대로 찾아가게 된 전시였다. 그리고 난 당연하게도 ‘마리 로랑생’이라는 그 유명한 화가의 이름을 몰랐다. 전시에 가기 전 프리뷰를 작성하기 위해 그녀의 삶을 찾아보았지만 솔직히 그렇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 이유는 한 가지일 거다. 그녀에 대한 자료들은 모두 제삼자의 시선에 갇혀 있었으니까. 그녀의 목소리를, 그녀의 작품보다 텍스트로 접한 그녀는 내게 그렇게 인상적이지 않았다.
그녀가 주인공인 전시관들을 걸으며 그녀의 작품들은 내게 말을 해왔다.
“내가 마리 로랑생이야.”라고.
그녀는 사실 엄청나게 존재감이 가득한 사람이다. 벨 에포크, 프랑스어로 ‘좋은 시대’란 뜻을 가진 단어이자, 19세기 말 ~ 20세기 초, 예술과 문화가 부흥했던 시기를 뜻한다. 1900년대 초, 화가 중 그녀는 흔하지 않은 여성 화가로, 화가 ‘마리 로랑생’의 삶은 상당히 역동적이었다. 사생아로 태어나 프랑스 예술가들의 중심에서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만들었다. 당시 남성 화가들의 강세에 야수파, 입체파 등이 미술사조의 큰 흐름이었음에도 그녀는 그들과 교류를 할 뿐, 그들에게 물들여지지는 않았다. 오롯이 그녀의 초반 작품부터 지속적으로 드러나던 그녀의 화풍이 후반기에는 안정적으로 두드러졌다. 즉 그녀에게 ‘아름다움’이라는 가치로 받아들여지는 분홍색과 파란색, 곡선과 부드러움, 여성이라는 주된 소재까지 그녀는 다른 누군가의 것이 아닌 ‘마리 로랑생’만의 화풍을 만들어갔다. 또한 그녀는 그녀가 가진 여성성을 감추거나 남성 화가들에 대항하기 위해 왜곡하지 않았다. 프랑스의 비평가인 다니엘 마르세유는 이것이 그녀의 위대함이자 약점이라고 표현했다. 주류에 휘둘리지 않고 걸어갔을 그녀의 커리어가 부드러운 그림과는 다르게 거칠었겠지만, 위대한 그녀의 작품을 만들었다. 그래서 그녀가 말하는 아름다움이 참 좋았다. 그녀의 그림 속 ‘말’은 ‘질주’를 의미한다기보다 ‘신화 속 백마’ 같다. 한 없이 부드럽고 주인을 모시는 말, 그 말을 타고 다니는 여성들의 모습은 자유로움이 보였고, 자주 등장하는 ‘새’ 역시 부드러움 속 자유를 뜻하는 것 같았다. 그녀가 추구하는 우아함과 아름다움을 잃지 않고, 그녀만의 따뜻하고 황홀한 색채가 가득한 그림들로 완성됐다.
그리고 점차 그녀의 그림 속 여성들의 눈빛은 한 없이 몽환적으로 변화하는데 이는 그녀의 삶에서 스스로 안정기를 찾은 느낌이었다. 안정적으로 어떠한 것도 관조할 수 있게 된 그녀의 시선을 마주하는 듯했다. 사생아로 태어나 불우했던 유년기, 벨 에포크, 기욤과의 세기의 사랑(미라보 다리의 연인), 두 번의 세계대전, 이혼, 홀로 된 삶, 화가로서의 삶, 모든 것을 다 겪고 난 그녀는 오롯이 화가로서 정체성을 완벽히 세운다.
후반기 그녀는 의상, 무대를 디자인하기도 했고, 그녀가 그려준 초상화가 없으면 안 될 정도로 다양한 커리어를 쌓아가며 화가 ‘마리 로랑생’을 만들어 갔다. 예술가로 살아가기로 결정한 그녀에게 최선의 길이었지 않았을까 싶다. ‘마리 로랑생’의 초상화에 얽힌 재밌는 이야기가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 ‘코코 샤넬’과 무대의상 디자인을 하며 친해진 마리는 샤넬의 초상화를 그려줬으나 샤넬은 자신을 너무 연약하게 그렸다며 수정 요구를 했다. 그렇지만 결국 마리는 수정 요구를 받아주지 않고 본인이 간직했는데 그것이 훗날 마리의 대표작이 되었다. 이 일화를 보고 있자면 예술가였던 ‘마리 로랑생’과 ‘코코 샤넬’이 자기 자신의 신념이 얼마나 뚜렷했는지 알 수 있다.
또한 그녀의 그림에서 신화적인 색채를 계속 느꼈다. 작품이 점차 중반부를 넘어가면서부터 신화 이야기를 다루는 벽화에서 본 구도를 자주 마주할 수 있었다. 종종 그녀의 그림에서는 여신이 등장하는데, ‘신화’만큼 몽환적이면서도 그녀의 색채 사용이 잘 어울리는 소재는 없지 않을까. 그런 신화적 모티프를 찾아내는 과정이 본 전시에서의 색다른 재미였다.
마지막 전시 파트 영상을 보면 ‘그녀의 그림’은 이렇게 표현된다. 거칠고, 조금은 난폭한 상황이든, 화풍이든, 역사든 그녀는 모두 부드러운 곡선 안에 담고 있다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을 감싸 안아 위로한다고 말이다.
모난 돌의 결말이 항상 부드러운 모래이듯이, 강함을 이겨내는 것은 꿋꿋한 부드러움이 아닐까.
최근 계속해서 떠오르는 몇 문장들이 있다. ‘서로의 온기로 모두의 밤이 따뜻하기를’, ‘따뜻함이 세상을 바꾸는 또 다른 방법은 아닐까.’, ‘따뜻함’이라는 단어에 대해 많이 생각하는 요즘이다. 부드럽고, 타인에게 관대하고, 아니 관대하지 않더라도 그저 던지는 친절 한 조각이 어느 누군가의 하루를 송두리째 바꿔놓는다면...! 어떠한 힘, 힘을 자랑하는 것보다 ‘따뜻함’이 훨씬 큰 영향을 주지 않을까. 언뜻 보면 연약해 보이고 만만해 보이지만 가장 크게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은 ‘따뜻함’에서 나오지 않을까. 화가 ‘마리 로랑생’이 부드러운 곡선을 놓치지 않은 것도 모두 그러한 뜻이 아닐까.
곡선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
빙그레 웃는 미소를 전할 수 있는 하루가 되길.
+
본 전시를 보고 나서 쓴 자작시 한 편...
우아한 무도회 또는 시골에서의 춤(마리 로랑생의 작품 제목 중 하나)
춤은 춤이다
손가락은 하늘로 향하고
고개는 쳐든다
턱의 각도는 내 자존감이다
발끝은 땅을 향해 날을 세운다
몸을 감싸고 있는 것은 값싼 실크,
춤을 추면 반짝거릴 오늘의 발레복
토슈즈는 오늘도 닳아 나는 맨발이다
흙이 여리지 않은 발바닥에 닿아 무대가 된다
주변에 돋아난 거친 수풀은 프로시니엄이다
원형 또는 별,
관중들이 만드는 오늘의 무대는 다이아몬드 모양
손목에 살짝 흘러내리는 실크 자락이 바람에 휘날린다
춤이 시작되었다
반짝이는 눈빛들이 만드는 하얀 조명,
거친 발바닥이 만드는 단단한 무대,
여러 박수가 만드는 하나의 박자,
오늘의 춤은 항상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관중들의 눈빛이 사그라들면
바람결에 날리던 실크 자락은 힘을 잃는다
조명은 꺼졌다
무대는 정리됐다
춤은 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