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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번째 삶 Dec 24. 2020

작은 혐오의 발견

툭, 전철 바닥으로 뭔가가 떨어졌다.  옆의 옆자리에 앉은 남자가 방금 손으로 튕겨낸 것. 무릎 위에 놓은 책에 시선을 둔 내게는 그 남자의 손가락이 잠깐 위아래로 움직이는 것이 스치듯 보였을 뿐이다. 대수롭지 않은 작은 동작 뒤에 그에게서 떨어져 나간 것은 움직이고 있었다. 그 움직임을 희미한 곁눈으로 보던 나는 책에서 눈을 떼어 그것을 바라보았다.


딱딱한 등을 바닥에 댄 채 여러 개의 다리를 쉴 새 없이 구부렸다 폈다 하는 것. 버둥거리면서 다시 뒤집으려 애쓰고 있었다. 약간 길쭉한 타원형 몸체. 집게벌레인가? 아무리 보아도 두 갈래로 갈라진 꼬리는 보이지 않는다. 그럼 바퀴벌레? 공벌레? 쥐며느리? 내 머릿속에는 내가 아는 발 많은 존재들이 차례로 떠올랐다. 카프카의 '변신'에 나오는 갑충을 떠올렸다면 거짓말이다. 영화 '  블랙'의 사람 가죽을 쓴 거대한 바퀴벌레 생각이 났다. 작은 바퀴벌레들이 수시로 떨어져 내리던 그 끔찍한 모습. 난 갑자기 소름이 끼쳐  혹시 다른 것이 더 있는지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떡하지? 이미 소리를 지르기엔 늦었다. 집에서 저런 것을 보았다면 달려와 줄 사람이 있을 때는 소리를 질렀을 것이고 아니면 손에 잡히는 무엇으로 그것을 잡으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는 공공장소이고 소리를 지른다고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렇다고 단번에 일어나 그것을 밟아버릴 수도 없었다. 그러기는 싫었다. 내 마음은 이미 책을 읽을 수 있는 평정심을 잃었다. 내 머릿속이 이렇게 바삐 굴러가는 동안에도 녀석은 계속 버둥거리며 이리저리 밀려다녔다.


나는 고개를 들어 주변 사람을 둘러보았다. 사람들은 거의 이 작은 것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다. 단 한 사람, 그것을 방금 손으로 튕겨낸 그 남자의 맞은편에 앉은 여자. 놀란 눈으로 두리번거리던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눈빛은 녀석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우리는 눈만 꿈벅이다 다시 그것을 주시했다. 녀도 나처럼 그게 집게벌레라면 덜 혐오스러울 것 같아 버둥거리는 것을 들여다보며 꼬리를 찾아내려고 했을까.


나는 그제야 이 녀석을 튕긴 그 남자의 옷차림을 흘깃 보았다. 바지엔 구멍 같은 것이 나 있었다. 노숙자인가? 두툼하고 긴 패딩을 입은 그는 노숙자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대체 저 벌레는 어디서 나온 것일까? 그의 옷 어딘가에 붙어 따라온 걸까? 전철 천장에서 떨어진 걸까? 하지만 좀 전 휴대폰을 손에 들고 가볍게 손을 털어 벌레를 떨어뜨린 그의 행동은 전혀 놀람이나 흔들림의 흔적 없이 조용히 이루어졌다. 익숙한 일을 대수롭지 않게 하는 느낌. 나는 좀 전에 앉으면서 그가 흑인이라는 걸 봐서 알고 있었다. 왠지 고개를 돌려 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슬쩍 옆으로 그의 얼굴을 보았다. 그 사실이 다시 확인되는 순간 나도 모르게 편견 같은 것이 작동할 뻔했다.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여전히 작은 것은 버둥거리고, 나는 또 다른 생각에 빠져들었다. 혹시 다른 벌레가 의자를 통해 나에게 기어 오는 것은 아닐까? 나는 괜스레 온몸을 가려운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내 앞 쪽의 그 작은 것을 잠깐씩 바라보면서 내 주변을 함께 훑기에 바빴다. 그러는 동안 그 남자와  사이에 비어있던 자리에 다른 한 사람이 와서 앉았다. 나는 내심 안심했다. 혹시나 더 남은 벌레가 있다면 기어 오다가 그에게 먼저 가겠구나, 하는 이상한 안도. 그는 그 작은 것의 정체를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여전히 버둥대는 그것과 맞은편의 그것을 노려보는 또 한 사람, 그리고 나의 대치를 알기나 하는지 아까 그 벌레를 무심하게 튕겨냈던 그는 홍대입구역에서 유유히 일어나 전철에서 내렸다. 어디에도 벌레가 나올 것 같지 않은 깔끔한 옷을 입은 그는 대체 어떻게 벌레를 발견했길래 그토록 의연하게 녀석을 튕겨 내버릴 수 있었던 걸까. 아직도 살아보려고 애쓰는 작은 혐오와 녀석을 바라보는 한 사람과 녀석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사람들을 남겨둔 채 나는 다음 에서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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