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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번째 삶 May 27. 2021

바람과 빗소리

오랜만에 힘들이지 않고 눈이 떠졌다. 며칠 만에 체력이 아주 좋아진 것은 아닐 것이고. 매일 반주로 하던 술을 조금씩 조절하고 있는 덕분인가. 아침마다 눈을 뜨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기까지 무척 힘이 들었는데, 어제 아침은 조금 수월했다. 아이가 두고 간 필통을 가져다 주려고 문을 나섰는데 오랜만에 마시는 아침 공기가 상쾌했다. 이상하게 몸이 가벼운 느낌. 이상하게도.


겨우 집 앞 도로까지 걸어 나간 것인데, 밤새 비 내린 뒤에 올라오는 풋풋한 내음. 이 시간에 이렇게 여유롭게 아이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보낸 것이 얼마만일까. 집으로 돌아와 평소 같으면 다시 침대로 들어가 이불을 푹 뒤집어 쓰고 잠을 청했을 텐데. 왠지 그 시간이 아까웠다. 일어나 이것저것 집안 일을 돌본다. 집에 있으면 언제나 내 손길을 기다리는 일들. 피곤하다는 핑계로 알아도 모른 척, 없는 척 지내온 시간이 약간 미안하다.




오늘도 같은 시간. 아이에게 아침을 차려주려고 맞춰 놓은 알람보다 조금 일찍 눈이 떠졌다. 아침 일찍 일어나 오전 시간을 나름대로 채워나가는 미라클모닝 챌린지가 유행이라고 들었다.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내 삶에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는데. 분명 어제도 저녁 먹으며 술을 한 잔 하고 잠이 들었는데. 이렇게 개운하게 눈이 떠지다니. 낯설다, 이런 아침. 마침 남편이 쉬는 날이라 아이의 아침을 남편이 차려준다. 나는 덕분에 다시 침대에 누워 평소처럼 다시 이불을 목까지 푹 덮었다. 하지만 눈이 초롱초롱, 정신이 맑아졌다. 일어나 창 밖을 보니 아직 비가 내리고 있다. 오늘은 촬영을 나가야겠다.


비가 온다는 핑계로 남편과 함께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 주고 비오는 찍는다. 한 손에 우산, 한 손에 삼각대를 들고 이리저리 보이는 풍경들을 담는다. 매번 결과물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은 늘 평범하고 반복되는 앵글. 그래도 오늘은 새롭다. 늘 보는 풍경이 아니다. 늘었다 줄었다 빗줄기에 갇힌 일상, 아주 오랫동안 반복되었을 누군가의 일상을 처음으로 담았다. 영상에 담긴 것은 부산한 아침의 소리와 함께 오롯이 들리는 빗소리. 집 안에서 어렴풋이 들리는 빗소리가 아니라 후두둑후두둑 바닥을 때리는 소리, 나뭇잎을 흔드는 소리,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


누군가 나에게 바람을 좋아하는 것 같다고 했다. 내가 찍은 영상에 바람이 자주 담긴다고. 그렇구나, 나는 바람을 좋아하는 구나. 누군가의 말에 의해 나를 정의해 본다.


오늘 나는 바람과 빗소리를 담아 왔다.




바람과 빗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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