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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번째 삶 Sep 20. 2021

오늘 처음 안 것처럼

코로나 백신 접종 후에

코로나 백신 접종 예약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가끔씩 들려오는 부작용이나 후유증 소식에 마음이 아주 가볍지는 않았다. 행여나 나에게도 안 좋은 일이 생길 수 있다는 생각에 남은 날에 대한 미련보다도 지나간 날에 대한 후회를 남기지 말아야겠다며 괜스레 비장한 마음을 먹기도 했다. 하루하루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으려고 애썼다. 맘껏 게으름을 부리던 내 지난날들보다 조금 일찍 눈이 떠졌고 약간씩 알차게 보낸 것 같다. 등교하는 아이들을 문 앞에서 한번 안아보고, 갈 때나 올 때나 인사를 꼭 챙겼다. 아침이면 잘 잤느냐는 인사와 잠들기 전 잘 자라는 인사가 새삼스럽게 특별했다. 만일에 내 삶이 이쯤에서 마감된다면, 내 남은 삶이 아쉬운 것보다 아이들에게 울타리로 든든하게 오래 남아주지 못한 것이 가장 아플 것이었다.


접종일 새벽에는 자다가 다리에 쥐가 나서 다리를 붙잡고 잠이 깼다. 출근하는 날보다 일찍 일어나 샤워를 하고 예약 시간이 다가올수록 아직 주사를 맞지도 않은 팔이 뻐근하고 아파왔다. 한동안 잠잠했던 어깨 통증이 다시 시작되는 것 같았다. 병원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대기 중이었다. 문진표를 작성하고 신분증을 내고 대기석으로 갔다.  띄엄띄엄 앉기는 했지만 그 사이 비집고 들어가 앉을 틈이 보이지 않아 그득한 사람들을 피해 구석에 가서 서 있었다. 병원은 3층에 있었다. 햇살이 가득 들어오는 너른 창 밖으로 전철역 앞 사거리가 내려다 보였다. 얼마 전 비 오던 날 광장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서 영상을 촬영하고 싶던 생각이 났다. 적당한 곳을 찾지 못해 아쉬웠는데, 이곳에서 찍었으면 좋았겠다, 어느 비 오는 날에 여기서 비 오는 풍경을 찍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해가 시작될 때 새로 다이어리를 펼치면 버킷리스트 작성란이 있다. 나는 크게 버킷리스트라고 할만한 것이 없었다. 그때그때 소소한 바람들이 있었을까, 올해는 이걸 꼭 해봐야지라던가 하는 것은 없었던 것 같다. 특별히 물욕도 별로 없는 것 같고. 최근에 나에게도 버킷리스트가 하나 생겼다. 좋아하는 배우가 하는 뮤지컬 공연에 가고 싶다는 것이었다. 10년도 더 전쯤, 이름도 몰랐던 어느 배우가 뮤지컬 넘버 부르는 모습을 보고 반해서 뮤지컬 보러 가고 싶은 생각에 한동안 몸살을 앓았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너무 어리고 늦게 하는 공연을 보고 집에 돌아오는 것이 당시 나에게는 어떤 궁리를 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 난제였었다. 그렇게 원하던 것을 하지 못하고 색이 바래버린 뒤에는 잊고 살았다. 그러다 최근에 알게 된 어느 배우가 과거에 했던 뮤지컬 공연 영상을 보고 난 뒤 살아 움직이는, 춤추고 노래하는 배우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나를 다시 흔들었다. 지금은 그 배우가 다른 일로 바빠 공연을 하지 못하고 있는데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도 좋지만 뮤지컬 공연을 하면 꼭 보러 가야겠다는 나의 '버킷리스트'가 생긴 것이다. 거기에  좀 전 병원에서 또 하나가 생겼다. 지금 만들려고 구상하고 있는 영상을 위해 딱 좋은 자리에서 비 오는 풍경을 찍고 싶다는 이 마음. 이런 것이 바로 버킷리스트가 아닐까. 그동안은 뭔가 거창한 것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왔는데. 꿈이란 건 그리 커야만 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불쑥 들어왔다.



의사는 문진표만 확인한 것인지 어떤 건지 예약된 환자를 진료하는 중간에 대기하는 사람들을 순서대로 불러 별다른 확인도 없이 주사만 놔주고 내보냈다. 주사 맞은 후 15분을 병원에서 대기하며 이상 반응이 있는지 확인하고 주의사항을 간호사에게 들으며 안내문을 받고 병원을 나왔다. 주사를 맞은 직후부터 조금씩 퍼지던 팔의 통증이 점차 일정 부분에 확실해지면서 머무는 것 같았다. 집으로 돌아와서 밥을 먹고 한잠 자고 일어나서 밥 먹고 또 잠을 잤다. 팔의 통증을 제외하곤 크게 아프거나 열이 나지 않는데 종일 잠이 쏟아졌다. 그동안 누적된 피로 때문인지, 백신 때문인지 모르겠다. 모처럼 출근하지 않는 날에 꼭 해야 할 어떤 일이 없기에 더 편안한 마음으로 쏟아지는 잠 속으로 빠져들 수 있었던 것도 같다.


주사를 맞고 이틀이 지났다. 팔의 통증은 처음보다 많이 사라졌다. 만져보면 딱딱하게 부어있는 것 같던 팔도 많이 부드러워졌다. 어제부터는 베란다에 꽃망울이 맺힌 호야 꽃을 찍고 있다. 타임랩스 기능이 없는 오래된 카메라라서 알람 시간 맞춰 중간중간 찍고 있다. 오늘은 배우고 싶던 노래 코드를 가르쳐주는 유튜브 영상을 보며 기타를 쳤다. 이런 여유, 시간과 마음의 여유는 내가 만들려고 하면 언제든 만들 수 있었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백신 접종으로 인해 많은 것들이 내 삶으로 들어왔다는 기분이 든다. 작은 것들의 소중함을 잊지 않고 매 순간 내가 하고 있는 일에 집중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마치 처음 안 것처럼, 잘 새겨두는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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