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이맘때 보낸 엽서를 받았다. "당신 편지 왔어!" 하며 남편이 나에게 내민 것은 낯선 풍경이 담긴 엽서였다. 잠시 어리둥절하여 뒷면을 보고 나니 작년에 보낸 기억이 떠올랐다. 당시에 참여하던 독서모임에서 인천으로 산책 겸 골목여행을 떠났었다. 월미공원 둘레길을 걷고서 각자 쓰고 싶은 이에게 엽서를 썼다. 인천 월미공원 느린 우체통은 엽서를 써서 넣으면 일 년 후에 보내준다. 나는 2019년의 나에게 썼다.
엽서를 받을 때쯤엔 올 한 해도 헛되이 보내지 않았다는 뿌듯한 마음으로 가득하길.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는 바람과 1년만 나를 사랑하겠다는 소망을 담아. - 2018년의 내가 2019년의 나에게
올해 초 다른 소소한 일들을 시작하게 되면서 그 모임에서 빠져나왔고 그 기억도 잊혔다. 오늘 엽서를 받고서야 일 년이 흘렀음을 실감한다. 그게 벌써 지난 12월이었구나.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고 공공연히 말해 놓곤 내가 한 말을 지키지 못했음에 늘 부채감을 느꼈다.안 한다며 너무 많이 하는 거 아니야, 마음속에 짐이 있었다. 그렇다고 누가 뭐라고 할 것인가. 그런데도 늘 마음 한쪽이 불편했다. 왜 나는 그런 말을 했던 걸까. 가만히, 조용히 나를 들여다보는 시간이 필요했다. 사람에게 지치고 피로감이 나를 넘어서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세상으로부터 나를 격리시키고 자발적으로 고립되어 회복의 시간을 갖길 바랐다.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는 건 진심이었으나 나를 그냥 내버려 두지 못한 건 내 무의식이었다. 그리고 다행이었다. 바쁘게 해 온 것들이 후회가 되는 것만은 아니니까. 안 하면 안 하는 대로, 하면 하는 대로 의미가 있다. 이제 그만 마음의 채무를 내려놓을 때다.
또 한 가지, 일 년만 나를 사랑하겠다는 소망은 이루었을까. 세상 누구보다도 나를 사랑하지 못하는 나에게, 나를 미워하는 나에게 그런 선물을 주고 싶었다. 평생은 못해도 마감기한이 있으면 쉬워지는 법이니까. 딱 일 년만 해 보자. 어떻게 나를 사랑했을까. 쉬지 않고 나를 데리고 밖으로 다녔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면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나를 더 미워하게 되었을 것이다. 나의 무위가 무능이라 탓하며.
그러고 보니 나는 두 가지 서로 상반되는 소망을 갖고 있었다. 아무것도 안 하면서 나를 사랑할 수는 없다. 처음 잠깐은 가능했을지 몰라도 금방 지쳐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가끔은 혼자 있는 회복의 시간이 필요하지만 계속해서 나만 들여다보았다면 나는 내 속의 검은 우물에 빠져들어 나오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일러스트 그리기, 기타 배우기, 요가하기, 강의 듣기. 매일 다른 활동을 하러 다니면서 마음속으론 너는 왜, 너는 왜, 물었다.그것이 나를 덜 지치게 했던 것 같다.
올해 했던 활동을 꼽으면 틈틈이 들고 난 것까지 열 손가락을 다 써야 한다. 그중에 다행히 시간 낭비였다고 생각되는 것은 없었다. 모두가 내 삶의 빈틈을 메워주는 것들이 되었다. 그동안 엄마, 아내, 딸, 며느리와 같이 큰 덩어리로만 채워져 있던 내 삶의 틈새에 작은 조각들이 차곡차곡 굴러 들어갔다. 이제 내 삶은 조금 덜 삐그덕 거릴 것이다. 모두가 그저 표면적인 활동일 뿐이었다 해도 내 안에서는 새로운 자극을 통해 화학반응을 일으켰을 것이다. 그로써 나는 좀 더 견고한 내면을 갖추어 가고 있다고 믿는다. 나의 한 해는 헛되지 않았다고, 나 자신을 그 어느 때보다 사랑해 주었다고 2018년의 나에게 다시 편지를 쓴다. 즉흥적으로 써서 넣었던 엽서덕분에 올 한 해를 하나하나 복기한다. 올해가 가기 전에 2020년의 나에게 엽서를 써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