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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번째 삶 Jan 17. 2020

겨울 냄새

나의 겨울 이야기

회색 하늘에 겨울 냄새가 물씬. 바람구멍 하나 없이 꼭꼭 닫아 놓은 베란다에서 오늘은 겨울 냄새가 난다. 창 밖의 하늘은 뿌옇고 공기는 축축해 금방 눈이 쏟아질 것 같은 날이다. 나는 이런 날의 냄새를 좋아한다.


내다보니 다육이들은 벌써 겨울을 준비하고 있었는지 붉은 가시는 세우고 이파리는 작고 붉게 옹기종기 피워 올렸다. 얼어 죽을까 봐 들여놓았다가 집에 고양이가 화분을 엎어 놓는 바람에 다시 내다 놓으면 얼어 죽는 악순환이 해마다 있었다. 올해는 포근날씨 덕에 그대로 베란다에 두었고 자주 들여다보지도 않는데 알아서 있어 기특하다.


눈이 올 것 같은 날에 맡을 수 있는 겨울 냄새가 요즘은 귀하다. 초반에 촤라락 양동이에 물 쏟듯 한 번 내린 눈, 내리자마자 사라져 버린 눈 가지곤 겨울 느낌은 어림도 없다. 게다가 낮 기온은 영상에 머물러 낮에는 두꺼운 옷이 답답할 정도다. 겨울 혹한이 오지 않아 어느 겨울 축제장은 울상이라는데. 겨울 냄새를 맡을 수 없어 아쉽지만 이렇게 덜 추운 겨울이 나는 고맙다.




느 해부터 나는 겨울이 무서웠다. 어릴 적은 모르겠고 내가 기억하는 후론 수도관이 어는 사건(?)을 겪은 적이 없다. 결혼 전에는 그런 적이 있어도 엄마가 해결했을 테니 수도가 언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전혀 몰랐다.


몇 년 전 내가 하던 가게에 물이 얼었다. '물이 얼었다고? 수도관이 얼어 물이 안 나온다고?' 남편과 나는 믿을 수 없어 어리둥절했다. 아파트에 살며 수도는 겨울에도 당연히 물이 잘 나오는 것이라 생각했다. 어느 날 갑자기 가게의 물이 얼어 수돗물이 안 나오고 화장실도 못 쓰게 되었지만 그 일의 심각성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다. 남편은 그냥 녹을 때까지 기다려보자고 했다. 무슨 일이야 있겠냐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렇게 아무 걱정 없이 며칠을, 아니 몇 주를 보냈던가. 어느 휴일 아침에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내 가게 앞에 물이 엄청나게 쏟아져 나온다는 것이다. 물이 터졌구나, 싶어 정신없이 가게로 달려갔다. 날이 풀리고 얼었던 수도관이 터져 물이 콸콸 넘치고 있었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우선 가게에 흘러넘친 물을 퍼내었지만 줄지 않았다. 근처에서 보고 있던 이웃 할아버지가 딱한 듯 수도 계량기를 먼저 잠그라고 했다.


한바탕 난리를 겪고 겨우 가게의 물을 다 퍼냈다. 그 뒤로 일어난 일은 내 삶에서 가장 큰, 아니 두 번째쯤 큰 충격을 내게 주었다. 넘친 물이 옆 가게까지 흘러넘쳐 젖은 물건의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눈은 뜨고 있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누군가의 말소리는 웅웅 거려 알아들을 수 없었다.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가게를 열고 여태 내가 번 돈보다 더 많이 물어줘야 하다니.


그 겨울 후로 남편과 나는 겨울이 싫어졌다. 한파가 올 때마다 가게에서 물이 얼까 봐 보초를 섰다. 겨울이면 동결방지용으로 틀어놓은 수돗물값이 십만 원을 넘겼다. 평소 수도 요금이 만 원대였으니 엄청난 차이지만 그래도 물이 얼어 터지는 것보다는 낫다며 우리는 멈추지 않았다. 남편과 나 둘 다 원래도 새가슴이었는데 겨울 추위에는 더 벌벌 떨게 되었다.


그다음엔 기록적 한파로 하수도가 얼어서, 또 한 번은 변기가 얼어서 별별 일을 겪으며 겨울이 몇 번 지나갔다. 그리고 이젠 제발 한파는 그만 왔으면 바랄 즈음에 가게의 수도관 동파 걱정을 한시름 놓게 되었다.




다육이 때문 내다보는 베란다 창 밖 풍경이 평화롭다. 겨울비가 내리는 덕에 겨울에도 비 냄새가 나지만 겨울 냄새를 맡을 수 있는 날이 드물어 서운하냐면 그렇지 않다. 겨울에만 볼 수 있는 눈 쌓인 풍경이 없어 조금 아쉽긴 해도 쨍한 추위로 모든 게 얼어붙는 날보단 이렇게 여유를 가질 수 있는 날이 더 좋다. 냉정하게 판단하자면 눈이 오는 걸  바라보며 좋은 시간은 짧고 그 뒤로 따라오는 번거로움과 걱정의 시간은 길다. 나는 잠깐의 즐거움보다 느긋하게 평화로울 수 있는 요즘의 겨울이 더 좋다. 겨울 냄새를 맡을 수 없어도 앞으로의 겨울이 올해만 같다면 나는 겨울이 다시 좋아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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