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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번째 삶 Dec 30. 2019

안 하는 편을 택할 자유

허먼 멜빌, 『필경사 바틀비 』



바틀비는 변호사 사무실에 필경사로 고용된다.  변호사는 단정하고 조용해 보이는 그의 모습을 보고 그를 고용한다. 변호사는 그의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원 세 명의 독특함에 이미 지쳐 있었다. 첫 사흘간 묵묵히 자신의 일인 필사를 하는 바틀비에게 변호사는 만족했다. 그러나 자신의 필사본을 확인하는 일을 함께 하자는 말에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고 말한다. 그 후에는 필사도 하지 않겠다고 버티는 바틀비. 그를 내보내려는 변호사의 노력에도 그는 "안 하는 편을 택하겠다"고만 말하고 사무실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다. 급기야 그를 사무실에 두고 이사를 하지만 바틀비는 그곳에 버티고 있었다. 그가 쓰던 사무실에 새로 들어온 변호사와 건물주는 바틀비를 경찰에 신고한다. 바틀비는 구치소에 갇혀 식사를 거부하다 죽음을 맞는다.




변호사는 필사하지 않겠다는 바틀비를 왜 쫓아내지 않았을까? 그는 오갈 데 없이 점잖고 쓸쓸해 보이는 사람을 내쫓는 것을 윤리적으로 못 견뎌했으며 그런 자비로운 자신의 모습이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그러다 바틀비로 인해 자신에게 오히려 안 좋은 이미지가 생기자 더 이상 봐줄 수 없어 그를 버리고 떠난다. 결국 구치소에 갇힌 그를 면회하며 그를 여기 보낸 것은 자기가 아니라고, 또 구치소가 그리 고약한 곳은 아니라고 변명한다. 누군가를 겉모습만으로 쉽게 동정하고 그를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하며 자기만족에 기뻐하는 우리들의 자화상을 변호사에게서 본다.


바틀비는 변호사의 어떤 요구나 제안에도 승낙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바틀비가 '하지 않겠다'라고 말하지 않고 '안 하는 편을 택하겠다'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어떤 것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선택지가 있고 그것을 선택하겠다는 선언이다. 처음엔 이상했던 말투가 사무실의 모든 사람들에게 전염되었다. 아무도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할 때 생각의 물꼬를 터주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신들이 살아온 견고한 습관과 제도에 반하는 바틀비의 태도에 화만 낸다. 자신들에게도 그런 선택이 가능함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왜 그러는지는 변호사만이 고민한다. 자신에게 저항한다고 생각했기에. 바틀비가 소극적인 저항을 했다고 변호사는 말한다. 그는 소극적이었을까. 바틀비는 돈을 받고 사무실에서 해야 할 일을 모두 거부했다. 처음엔 잡무를 거부했지만 나중엔 필사까지도. 그건 소극적이 아니고 전적인 것이 아니었을까? 안 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음을 무시당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쯤 되면 가슴이 답답해짐을 느낀다. 바틀비는 대체 왜 그랬을까? 그에게는 자유가 있었다. 누구도 거부할 수 있음을 모를 때 그는 안 하는 편을 '택할' 자유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답답한 이유는 그가 거부함으로써 누군가에게 피해를 입힌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사회적 관계에서 잘못된 점이 있다면 부당한 요구에 대항해 함께 개선의 노력을 하기보다는 각자에게 익숙한 방식에 변화가 생기는 것을 오히려 경계하고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바틀비는 '안 하는 것을 선택하는' 자유를 누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바람을 이해하고 변화시키고자 한 사람은 없었다. 그가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있었던 곳은 구치소 안이었다. '그의 모든 태도가 매우 차분하고 해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를 구치소 안에서 자유로이 다니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 안에서 바틀비는, 유일하게 선택할 수 있었던 식사를 거부하는 것으로 자유를 누렸다. 아무 구속도 없는 곳에서의 자유는 얼마나 무의미한가.



시인 보르헤스는 <필경사 바틀비>가 프란츠 카프카를 연상시킨다고 했다. 카프카는 우리가 궁금해하는 것들에게 대해 친절하게 설명해주지 않는다. 바틀비도 그렇다. 그는 왜 그랬을까를 생각하다 보면 '왜?'라는 수렁에 빠지게 된다. 나는 카프카의 <어느 단식 광대>를 떠올렸다. 광대는 흥행주에게 고용되어 사람들에게 단식 과정을 보여주는 일을 한다. 흥행주의 반대로 더 길게 단식하지 못했던 광대는 서커스단과 계약하면서 원하던 단식을 계속한다. 단식을 하다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광대에게서 바틀비의 모습을 본다. 광대는 스스로 동물 우리에 갇혀 누구의 간섭도 없이 계속해서 단식할 수 있음에 진정으로 자유를 느꼈을까? 바틀비도 변호사의 도움을 거절하고 스스로 구치소에 갇혀 단식을 선택한다. 그들이 원했던 자유는 무엇이었을까? 누구의 관심도 없는 자유? 어떤 구속도 없는 곳에서의 자유?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는 곳에서의 자유? 우리는 지금 자유를 갖고 있을까? 자유를 가졌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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