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에 걸려 온 전화 한 통

연락이 끊어진 게 아니야

by 세번째 삶

사촌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모르는 번호라서 받지 않았더니 문자를 보내왔다. 사촌 동생 S라고. 보고 싶었다는 말은 낯설었다. 나는 오랜만에 연락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그렇듯 자신의 경조사를 알리려는 목적인가 생각했다. S가 이제 결혼하려나.


전화를 받아보니 내 예상과 달리 그런 목적은 아니었다. 명절날 갑자기 내 생각이 나서 내 번호를 수배했노라고 했다. S와 통화라는 걸 해 본 것이 몇 년만일까. 한 이삼십 년 되었을까. 어릴 적엔 외삼촌 댁과 우리 집이 가깝고 비슷한 또래였기에 자주 어울려 놀았지만 성인이 되고 전화 통화를 주체적으로 할 수 있게 된 뒤엔 그다지 왕래가 없었다. 친척들 경조사에 가면 얼굴을 마주쳤을 뿐. 경조사에서 얼굴을 본 지도 오 년이 넘었을 것이다.




S는 첫마디부터 혀가 꼬여 있었다. 이른바 꽐라였다. 술에 취해서 내 생각이 난 걸까. 먼저 내 생각이 났는데 술에 취해서야 전화한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며 건성으로 물음에 답했다. 그동안 연락이 끊어져 아쉬웠다는 말과 어디에 사느냐는 말, 잘 살고 있느냐는 말을 몇 번 반복했다. 우리가 그리 친하지는 않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뭐 아쉽다고 전화해서 한번 만나자는 말을 몇 번이나 하는 걸까. 나는 살짝 짜증이 났지만 매몰차게 끊어버릴 수는 없었다.


나와 몇 살 차이였는지도 잊어버렸다. 저와 내가 한 살 차이밖에 나지 않지만 자기에게는 내가 동경의 대상이었다고 했다. 언니는 늘 멋있었다고. 뜻밖이었다. 한 번도 S에게 나의 존재가 의미 있을 것이라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 시절 잠깐은 그랬을지 몰라도 우리의 삶은 이미 너무 멀리 있었다.


한 말을 하고 또 하는 중에 이런 말들이 있었다. 고모들과 내가 연락하지 않고 지낸다는 말을 듣고 섭섭했다고, 저한테는 고모지만 나한테는 이모가 아니냐고. 이모들과는 연락하고 지내야 하는 게 아니냐고. 큰 고모가 돌아가시기 전 엄마(S의 엄마, 나의 외숙모)에게 언니랑 오빠 부탁한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연락이 끊어져 아쉬워한다고.


오랜만에 불쑥 전화하여 늘어놓기엔 어색한 말들이 술기운을 빌어 이어지고 있었다. 흡사 어른에게 혼나는 아이의 기분으로 듣고 있던 나는 '연락이 끊어졌다'는 말이 거듭되는 동안 그게 무슨 뜻일까 생각해 보았다.


연락이 끊어진다는 말은 옛날처럼 어디 사는지 알 길이 없거나 전화를 걸 수도 없거나 생사를 알 수 없을 때 하는 말이 아닌가. 요즘은 몇 개의 페북만 추적해도 어디에서 무얼 하고 사는지 알 수 있는 시대인데. 스스로 연락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기에 연락을 안 하는 것뿐이지 연락이 '끊어진다'라는 말은 너무나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말인 것이다.


S의 그런 말은 내 쪽에서 연락을 하지 않음을 서운해하는 말로 들렸다. 왜 그동안 연락하지 않았느냐고. 내가 연락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는 사람들에게 연락을 하고 살아야 할 의무는 없지 않나. 이모들과도 필요한 일이 있으면 연락을 주고받는데 매주 혹은 매달 안부를 주고받아야만 '연락한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S의 말속의 나는 마치 버려진 아이 같기도 하고 매정한 아이 같기도 했다.


그렇다면 친척들은 왜 먼저 '연락'하지 않고 살았을까. 그들은 나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궁금하다. 내가 없는 곳에서 맘껏 나를 재단하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갖다 붙였을 말들을 생각했다. 그걸로 이제는 성에 차지 않는 걸까. 내게 뭔가 직접 확인이라도 하고 싶은 걸까.


나는 과거로의 소환을 좋아하지 않는다. 어릴 적의 좋은 기억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친척들과의 기억 중에도 기쁘거나 행복했던 것보다 수치스럽거나 죄책감을 느끼는 일이 대부분이다. 그들과 억지로 엮으며 과거를 소환하는 것이 내게 고통이라면 굳이 내가 해야 할 이유는 없지 않을까. 게다가 '친척'이라는 관계가 나에 대한 권리라도 되는 것처럼 내 삶을 평가하려 한다는 것도 납득할 수 없다.




조만간 만나자는 기약 없는 약속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우리는 만나게 될까. 내일 아침 술에서 깨어난 S는 나와의 통화를 기억이나 할까. 기억을 해내서 이불 킥을 하지나 않을까.


명절 저녁에 걸려온 전화 한 통에 슬픔, 그리움, 분노가 뒤섞인 알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가 나를 감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