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관성 치매가 우려된다니...
유독 취약한 분야가 있다. 밥의 물을 맞추는 것, 사람의 얼굴을 기억하는 것, 핸드폰을 떨어뜨리지 않는 것, 그리고 각 사이트의 '내 비밀번호'를 기억하는 것이 그렇다. 한 마디로 기억력이 좋지 않다.
언젠가 건강검진 결과에 '혈관성 치매'가 우려된다며, 건강관리를 잘하라는 문구가 찍힌 건강검진 결과서를 받은 적도 있었다. 너무 어이가 없는 결과에 '날 어떻게 안다고? 이걸 고작 피검사로 알 수 있는 거야? 근데 정말로 내 기억력의 수준을 알고 있는 건가?'라고 적잖이 놀랐다. 무려 5년 전, 지금보다 뇌가 젊었을 때이니, '치매 우려'라는 결과지는 충격적이면서도 나의 건망증을 인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아마도 질문에 답하는 건강검진 문진표에 '물건을 잘 잊어버리거나 기억력이 좋지 않습니다.'류의 답변을 했기 때문에 나온 결과라고 추측된다.
기억력이 좋지 않은 이유는 마음속 상처를 덜어내기 위한 방어기제가 만든 '내면 진화'의 산물이 만들어낸 결과라고 추측된다. 세월과 함께 켜켜이 쌓이는 상처들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해 은연중에 '잊는 방법'을 택했었다. 학창 시절부터 시험을 망친 날에는 교문 밖을 나서는 순간, 교문 옆 풀숲에 성적에 대한 생각들을 의식적으로 버려버렸다. 어차피 내 힘으로 바꿀 수 없다면 '안 좋은 생각들을 버리자. 다시 생각나더라도 내일 시험부터 일단 잘 보고, 그다음에 버렸던 생각들은 다시 주워가자.'라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지킬 방법을 택했다. 시험 외에도 갖가지 힘든 상황 속에서 마음에 모든 것을 담아두고 살기에는 너무 버거웠다. 무거웠다. 무거운 고민의 짐들을 하나, 둘씩 버리는 연습을 하며 사춘기 시절을 보냈다. 그 습관들이 쌓이다 보니 어느 순간, 나의 무의식은,
아, 얘는 뇌가 무거운 것을 못 버티는구나. 기억 저장 장치들아, 여기서 철수해!
라는 작전을 짰는지, 정말 물리적으로 기억력의 성능이 후퇴하는 것이 느껴졌다. (신기할세-) 생각이 습관이 되고, 그 습관이 나를 만든다고. 좋게 말해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라는 노력들이 모여 '기억력이 나쁜' 나를 만들었다. 잘 잊고, 초기화가 잘 되니 많은 고민들을 끌어안고 살지 않아 보이는 장점도 있다. 하지만 무엇이든 극단적이면 어디에선가 터지는 법.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웃어넘기고 잊어버리며 사는 와중에 마음의 병이 찾아오고 있는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비밀번호]를 몰라요.
오늘 아침, 새로 지은 밥은 물을 너무 많이 넣어서 죽밥- 이 되었다. 전기밥솥 사용 경력 10년 차면 이제는 찰진 밥을 눈 감고도 할 법도 한데 가끔씩 밥물 맞추기 분야에서 어이없는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사람의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안면인식에 문제가 있는 건지, 10번쯤은 대화를 하고 오래 만나야 사람의 얼굴과 이름을 매칭 해서 겨우 기억한다. 핸드폰은 자주 떨어뜨려서 액정 필름은 늘 금이 가있다. 어차피 자주 떨어트릴 거니까 차라리 금 가 있는 편이 마음이 편하다. 새로 액정 보호 필름을 붙여놓으면 언제 또 떨어트릴지 몰라 조마조마할 테니 굳이 새로 필름을 바꾸지 않는다. 차라리 금이 가 있으면 또 떨어트려도 금 하나 추가하는 것뿐이니 마음이 편한 쪽을 택한다. 밥이야 대충 먹으면 되고, 이름이야 물어보면 되고, 핸드폰 필름은 신경 안 쓰면 괜찮을 뿐인데, 내 기억력의 한계에 봉착하는 가장 큰 난관은 바로 '비밀번호 찾기'분야이다.
각 사이트마다 요구하는 비밀번호의 형식, 글자 수가 다르다 보니 기억력이 약한 나에게는 여러 사이트의 비밀번호가 미로 속에서 길을 찾는 것보다 더 어렵다. 물론 비밀번호 자동 입력, 자동 로그인 기능을 사용하고는 있다. 그럼에도 가끔씩 로그인이 해제되어 새로 비밀번호를 입력해야 하는 순간을 만나면 진땀부터 흐른다.
휴, 뭐더라. 제발 맞아라. 여기에 기호 하나를 추가했던가?
이리저리 자주 쓰는 비밀번호를 변형하여 입력해보지만 결국, 5회 이상 틀린 비밀번호를 입력했으니 그다음 문제까지 풀으라는 미션을 받게 된다. 정말 싫은 그 페이지를 결국 또 만났다.
동네방네 휴게소, 전화번호의 앞에서 2번째 숫자는 무엇입니까?
사진에 있는 그대로의 "2"를 입력하면 될, 단순한 과정이지만 그 페이지 자체가 기억력이 좋지 못한 나를 마주하는 것 같아서 얼굴은 화끈거리고 손가락은 괜히 떨린다. 차분하게 입력하면 될 것을, 마음이 급해져서 재입력한 비밀번호는 계속 틀리고, 새로 지정한 비밀번호조차 그 사이 또 잊어버린다. 옆에서 지켜보는 이도, 무엇보다 스스로가 답답한 순간. 괜한 화풀이를 한다.
어휴- 뭘 이렇게 복잡하게 만들어놨어. 그냥 로그인시켜주지! (아무 말 화풀이)
왜 이전 비번은 못쓰게 하는 거야???
정보통신 강국의 치밀한 보안체계에 괜한 화풀이를 하며, 어떤 때에는 비밀번호 찾기를 아예 포기하거나 새로 아이디를 만들어버리고 만다. 한 때는 비밀번호를 수첩에 모두 쫙- 적어둔 적도 있었으나 그 수첩마저 잊어버린 나는. 정말 덜-된 인간인가 보다. 나만 이렇게 비번 찾는 것이 어려운가?라는 생각을 하며 심호흡하고 겨우겨우 비번을 찾은 후에는 장렬하게 침대에 누워버린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1초면 해결될 과정이 때로 나에게는 1시간, 하루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다.
비밀번호를 찾기 위한 나만의 험난한 난관들. 차라리 마음도 이렇게 풀리면 좋겠다.
'떡볶이를 며칠 전에 먹었는지 입력하시오.'라는 질문에 답하면 마음이 풀렸으면 좋겠다.
모르는 것이 인터넷 비밀번호뿐이랴.
내가 너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
라는 노래 가사처럼(이 가사 아시는 분, 최소 80년대생!) '내 마음도 내가 모르겠는데, 내 비밀번호를 알겠느냐.' 잊어버린 비밀번호는 '비밀번호 찾기' 기능으로 천천히 찾으면 된다. 그 기능으로도 못 찾겠을 때에는 잠시 굳이 찾는 과정을 내려두고 며칠 후 다시 찾다 보면 갑자기 비번이 우연히 생각나기도 한다.
마음에도 '비밀번호 찾기' 기능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 마음을 모르겠을 때에는 '떡볶이를 며칠 전에 먹었는지 입력하시오.'라는 질문에 정답만 입력하면 마음속에서 딱딱 내 마음에 대한 비밀번호를 풀리면 참 좋겠다. 마음도 차라리 기계적으로 몇 단계를 거치기만 하면 풀리면 좋겠다. 컴퓨터처럼 기계적으로 마음을 풀어내는 프로그램이 개발만 된다면 그 개발자에게 세상은 노벨평화상을 수여해야 한다.
늘 쓰던 비밀번호를 수 없이 변형하여 입력한들, 비밀번호는 풀리지 않는다. 비밀번호는 늘 쓰던 것을 쓰다 보니 비밀번호 재입력 과정에서도 우리는 늘 쓰던 비번을 입력하곤 해답을 찾지 못해 머리를 싸맨다. 사실상 한 번 이상 수정된 비밀번호는 '전혀 다른', '그동안의 비밀번호 패턴과는 다른' '예상하지 못한' 형태일 가능성이 높다. 우리의 마음을 푸는 해답 역시 그렇다. 늘 생각하던 대로, 어제와 같은 방식으로 마음을 풀려고 하면 고민의 실타래는 더욱 복잡하게 꼬여만 간다. 새로운 길로 가보자. 백지상태에서의 '발상의 전환',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보기'라는 단순하지만 평범한 방법으로 마음의 비밀번호를 재입력하자.
어느 순간부터 나는 실수를 하거나 문제가 생기면 다음과 같이 생각하게 됐다.
'더 위험하거나 안 좋은 것을 피하도록 그런 실수를 저질렀거나 그런 일이 일어난 모양이다'라고. '되면 좋고, 안 되면 더 좋고!'라는 말처럼 상황을 긍정적으로 인식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나마 어려움을 덜 겪은 것에 감사히 여기는 식으로 생각을 돌려야 마음이 편해진다.
-그때그때 가볍게 산다.(장성숙)-
<반창고 생각> 여러분의 마음에 문장으로 반창고를 붙여드립니다.
나도 몰랐던 내 마음속 비밀번호를 풀어낼 수 있는 핵심 키는 '전혀 다른-' 곳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