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장이 열리는 동네에 산다. 코로나 방역 조치가 완화된 이후, 한동안 열리지 않던 5일장도 다시 열리기 시작했다. 내가 사는 동네를 기준으로 버스로 20~30분 거리 약 5곳의 동네에서는 5일마다 장이 열린다. 도시 사람들에게는 굳이 여행을 갔다가 찾아야 하는 특별 코스이겠지만 시골 사람에게 5일장은 대형 마트보다 더 오래된 추억이 간직된 곳이며, 지극히 친숙한 삶의 일부이다.
5일장을 이용한 장보기는 대형마트의 장보기와 다르게 제약 조건들이 있다. 첫째, 정기시장이므로 원하는 때, 물건을 바로 살 수는 없다. 다른 동네로 굳이 원정을 가지 않는 한, 최소 5일 동안은 장이 열리기를 기다려야 필요한 물건을 구매할 수 있다.
과일은 장이 싱싱하고 싸. 내일 장날이니까 하루만 더 기다렸다가 사자.
둘째, 날씨의 제약을 많이 받는다. 5일을 기다려 드디어 장날이 되었더라도 폭우나 폭설이라도 쏟아진다면, 그날의 장보기는 실패이다. 날씨가 너무 더운 시기에도, 너무 추운 시기에도 땀을 뻘뻘 흘리거나, 꽁꽁 언 손을 호호 불어가며 장을 봐야 한다는 제약이 생긴다. 셋째, '어서 오세요. 고객님'이라는 방송 멘트가 흘러나오지 않는다. 고객님으로써의 극진한 고객님 서비스와 편의를 기대할 수 없다. 화장실도 없으니 미리 만반의 준비를 하고 가야 한다. 다만 고객님 대신 '언니, 이모, 삼촌, 아들- 또 왔어?'류의 가족친화적 푸근한 호칭으로 상인분들께 불리게 된다. 소비자 역시 '할머니, 엄니~ 파 한 단에 어떻게 해요? 오늘 생선 뭐가 좋아요?'류의 급 친화적 단어를 사용하는 모두가 한 가족, 같은 동네 사람임을 듬뿍 느낄 수 있는 소비문화를 경험할 수 있다.
주말 오후, 무심코 달력을 보다가 어? 오늘 장날이네? 생각이 들어 현금 5만 원을 챙겨 장구경을 나선다.
나름 읍내 나들이를 나간다며 대충 베이스 화장도 찍어 누르고, 머리도 예쁘게 묶고 나니 장에 나서려는 내 모습이 어찌나 웃기던지. 오랜만에 읍내 장에 간다고 신나 하는 모습에 푸하하 웃음이 났다. 동네 대형마트도 슬리퍼 끌고 가면서 장에 갈 때에는 풀메이크업이라니. 그만큼 오랜만의 장구경은 살짝 설레었다.
장바구니를 채우러, 마음을 채우러.
5일장이라는 곳은 동네 사람, 아는 지인, 지인의 지인의 지인을 충분히 만나고도 남을 그런 공간이다. 집 앞 대형 마트에 가서 두부 하나 사 올 때의 차림과 다르게 내가 조금 더 신경 쓰는 이유가 5일장에서는 북적북적 부대끼는 사람들 속에 아는 사람을 꼭 한 명 이상은 만나기 때문.
어릴 때 부모님과 함께 5일장에 가면 열 걸음 이상을 연속으로 가지 못했을 정도-라고 살짝 과장해서 이야기하곤 했다. 부모님은 장에서 친구를 만나면 꼭 나에게도 인사를 시키셨다. 인사를 하러 장에 온 건지, 장을 보러 온 건지 모르게 정말 다양한 관계로 엮인 부모님의 지인들을 그 좁은 장터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만날 수 있었다.
A: 워~쩐 일로 왔어?
B: 으응~ 고추 말린 것좀 사러 왔지~
A: 쪼~기 땡땡이 엄마(아빠 친구의 사모님)도 왔어. 아래에서 과일 사고 있어.
B: 그려? 앵앵이 엄마(아빠 시점: 친구의 부인)도 아까 지나가던데?
A: 어, 저기 보이네~ 까르르. 동네 사람 여기서 다 만나네.
B: 여보, 땡땡이 엄마랑 앵앵이 엄마도 왔대. 과일 가게에 있나 봐.
C: 앵앵이 엄마, 여기서 만나네. 과일 샀어? 우리 손주야. 인사해~
나: 안녕하세요? 아들, 인사해. 할아버지, 할머니 친구분이셔.
늘 장에 가면 이런 대화가 오간다. 장 한가운데에서 우연히 마주치면 그렇게 반가워하신다. 분명 어제 만난 친구분인데도 장에서의 만남은 또 다른가보다. 어제 만난 친구를 오늘 우연히 스타벅스에서 만나면 더 반갑고 신기한 기분과 비슷한 느낌일까? 이 정도로 자주, 그리고 동시다발적으로 여러 명의 지인을 만나게 되는 상황이라면, 장은 정기 시장인 동시에 시골 동네의 정기 모임 장소나 마찬가지이다.
5일장에는 사람 냄새가 난다. 인심 후하게 잔뜩 나물의 덤을 얹어주시는 할머님도, 오가는 사람들 속에의 뜻밖의 만남도, 너무 따듯하다. 사람이 고플 때는 장에 간다. 꼭 무엇을 사기 위해 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만나러, 사람 사는 냄새를 맡으러 간다. 온기의 냄새에 파묻히다 보면 삶의 무게도 잠시 잊혀진다. 마음속 고민들이 삶을 괴롭힐 때 장에 나가 과일도 장바구니에 담고, 떡볶이에 어묵까지 사 먹는다. 바람에 스치는 생선 비린내를 찌릿- 맡다 보면 무거웠던 고민들은 생선 비린내의 강렬함에 비해 별 것 아닌 일이 되어버리는 순간도 마주한다. 그래서 5일장이 좋다. 사람 냄새를 맡으며 삶의 무게를 덜어낼 수 있는 곳. 다소 덜 편하고, 덜 정리되어 있지만 그곳은 정확하게 무게를 재지 않고, 사람을 재지 않는다. 온기 가득한 손으로 턱턱 나물의 덤을 얹어주고 '아이코~ 아이가 많이 컸다.'며 손에 뻥튀기, 과일, 쥐포들을 쥐어주신다. 덤은 저울의 무게를 넘어 사람 냄새를 그득히 마음속에 퍼담아준다. 따듯하다. 참, 좋다.
떡볶이와 족발과 어묵과.. 주전부리의 천국
떡볶이는 못 참지. 장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떡볶이 집에서 조금 더 올라간 가게에서 갓 튀긴 어묵까지 포장해와서 식탁에 쫙 펼쳐내니 세상 부러울 것 없는 한 끼가 차려졌다. 그다음 주전부리를 탐하러 발길을 옮긴 곳은 족발!)
(따끈한 족발을 쓱쓱 쓸어 수북이 담아주시는 사이 가판대 앞에 마지막 하나 남은 돼지 껍데기까지. 3000원이라는 착한 가격에 놀라며 족발 중간 사이즈 하나, 돼지 껍데기 하나- 저렴한 가격에 장바구니에 추가해 넣었다.)
간식만 살 순 없잖아
한 바구니에 만원 하는 명란젓! 명란젓은 꼭 항구에 가서 신선한 것으로 사 오던 내가 흔들리던 순간이었다. 너무 저렴한 가격에 못 이겨 명란을 가득 사와 참기름 휘휘 둘러 뜨신 밥에 척 올려 먹는 행복. 명란젓도 장바구니에 담아본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두부집- 이 두부집에서 두부를 사 먹은 지는 20년이 되어 간다. 어릴 때는 부모님께서 이 집 두부로 반찬을 해주셨고, 이제는 내가 일부러 찾아가는 두부집이 되었다. 단골 가게의 대물림-이랄까. 이 두부집의 두부는 마트에서 파는 두부와는 확실히 차이가 난다. 고소한 콩의 맛이 그대로 살아있는 부들한 두부 맛을 한 번 알게 되면 누구라도 푹 빠지게 될 것이다. 장에 나오시는 상인분들은 지역 장을 순차적으로 돌아다니신다. 두부 파시는 분이 오늘은 A지역 장, 내일은 B지역 장, 모레는 C지역 장 순으로 돌아다니는 패턴도 세월 따라 알게 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장이 서는 5일을 기다리겠지만 단골 두부집만은 5일을 다 못 기다리고 그분이 계신 곳으로 장을 찾아간다.
그만큼 믿을 수 있는 재료와 제조 과정에 대한 신뢰, 오랜 세월 동안 장에서 만나오며 쌓인 생산자와의 정. 바로 이것이 5일장만이 지닌 큰 장점이 되어 5일마다 장에 간다. 장바구니를 채우러, 마음을 채우러.
내가 오징어와 반찬거리를 사는 동안 우리 집 꼬맹이는 아빠로부터 슬러쉬 한잔을 득템하고 있었다. 머리 띵-하게 만드는 포도맛 슬러쉬- 우리 아이도 이렇게 장에 대한 추억을 쌓아가겠지. 내가 어린 시절 그랬던 것처럼.
5일장에 가면 과일도 있고 생선도 있고.. 파리지옥도 있다!!!
(올여름 초파리 퇴치용으로 꼭 이 파리지옥을 사야겠다고 다짐했다. 파리지옥을 장에서 만날 줄이야. 식물원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아이와 함께 보던 다큐에서 봤던 파리지옥을 생활력 있는 아줌마의 시선으로 마주하니 초파리 잡기로 너무 좋겠다 싶었다. 여름철 스트레스를 주는 초파리들을 이제는 파리지옥에 빠트려 버려야겠다. 훗)
(그동안 왜 몰랐을까. 장에서 그냥 지나치던 아이템들이 보이던 순간. 5만 원만 쓰고 오겠다는 예산 계획이 틀어졌지만 안 살 수가 없었다. 내가 찾던 사이즈의 작은 삔 만 500원에 사 오려는데 눈에 띈 집게 핀이 너무 예뻤다. 친절하신 할머님께서 지키시는 이 작은 가게는 앞으로 단골 가게가 될 것 같다. 두 손 가득 담아온 간식들과 반찬과 일용할 양식들. 이 정도 소비면 어느 쇼핑몰 나들이 부럽지 않게 참 야무지게 잘 샀다.)
삶의 무게를 덜어내고 온기로 마음을 채운다.
살림을 하며 대형마트도 가고, 새벽 배송도 이용한다. 대형마트의 장점도 있고, 동네 식자재 마트의 특색도 좋아한다. 게다가 새벽 배송은 없으면 큰일 나는 생활의 동반자 같은 존재이다.
그럼에도 5일장을 기다리는 이유는 따끈한 어묵 국물에서 솔솔 풍겨 나오는 사람 냄새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깔끔하게 포장되어 집 앞까지 새벽에 배송해주는 배송 시스템의 장점에 기대어 살고 있긴 해도 여전히 갓 삶은 장날의 족발이 더 따듯하고, 또 왔냐며 알아봐 주는 과일 가게 이모님이 정겹고, 지난주에 재료 소진으로 구매에는 실패한 만두 가게 아저씨의 손맛이 그리워서이다.
사람 사는 냄새.
그 냄새가 참 좋다. 빽빽한 현대사회생활이 지칠 때, 모든 것을 잊게 해 준다. 코로나가 덮친 2년 간의 텅 빈 장 거리가 한동안 참 쓸쓸하더니 장거리는 조금씩 활력을 되찾아간다. 조금씩 웃음을 찾아가는 나를 닮았다,
그래서 오늘도 5일 후의 장날을 기다린다. 삶의 무게를 덜어내고, 온기로 마음을 채운다. 깔끔한 화장실은 없지만 푸근한 사람 사는 냄새를 만날 수 있다. 서로 부딪히기도 하고, 몰라도 아는 척 '어머니~'라고 부르며, 삭막했던 표정을 걷어내고 웃음 지을 수 있는 편안함이 있다. 그곳에서 5일마다 삶의 무게도 잠시 덜어내 본다.
<반창고 문장> 여러분의 마음에 문장으로 반창고를 붙여드립니다.
감정을 잘 조절하는 사람은 감정을 알아채는 능력이 탁월합니다. 분노, 우울, 불안, 짜증이 밀려오는 순간 가슴이 쿵쿵대고 숨이 가빠지고 뒷골이 당기는 것 같습니다. 그때 그들은 ‘일시 정지’ 버튼을 누릅니다. 그들은 어디든 쉴 만한 곳으로 가서 숨쉬기도 해 보고... 정 안 되면 화장실이라도 가서 옷매무새라도 다듬습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음으로써 감정에서 빠져나오려는 것입니다.
-홀로서기 심리학, 감정을 잘 다스리는 사람들의 특징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