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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모 Jan 07. 2022

[단편] 인연

우연과 인연과 필연에 대하여

사막 같던 건물을 벗어나 부지런히 길을 걸었다. 퇴근 후 집에 가는 방향과는 정반대였지만 매일 저녁, 나는 좁은 골목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그 빵집에 들린다. 우락부락 부풀대로 부풀어 오른 소보루빵, 공갈빵과 유사하게 생겼지만 야채를 한아름 품고 있는 반전 있는 야채빵, 또 겉은 바삭하지만 어느 빵집의 것보다도 부드러운 내면을 가진 바게트빵까지... 사실, 내가 매일 이곳을 찾는 이유는 빵 때문만은 아니다. 그럼 무엇 때문이냐고? 그건 바로... "오늘은 조금 늦으셨네요?" 바로 이 사람. 빵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그녀 때문이다. "네, 퇴근하려는데 상사가 일을 시키는 바람에..." 미리 말해 두지만 지금 내 얼굴이 빨개진 건 절대 그녀 때문이 아니다. 추운 골목 사이 불어오는 칼바람에 두 뺨을 사정 없이 얻어 맞다가 갑자기 모락모락 달콤한 김이 피어오르는 빵집으로 막 들어섰기 때문이다. ... 정말이다. "오늘은 어떤 빵으로 드릴까요?" 달콤한 목소리로 물어오는 그녀 때문에 나는 괜시리 빵을 고르는 척 하며 붉어진 얼굴을 숨긴다. "글쎄요. 역시 갓 구운 빵이 좋을 것 같은데. 추천해 주시겠어요?" 

아침, 점심, 저녁. 매일 세 차례 빵을 굽는 이곳에서는 회사원들의 퇴근 시간에 맞춰 모락모락 김이 나는 새로운 빵이 나온다. 내 요청에 그녀는 지금 막 나온 갓 구워진 빵을 하나씩 소개해주었지만 사실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대충 두어 가지 빵을 가리키며 "포장해주세요." 답한다. 그녀는 빙긋 웃으며 빵을 봉투에 담고, 나는 금세 시무룩해진다. 이제 나는 곧 가게를 나서야 하고, 내일이 되어서야 그녀를 볼 수 있을 테니까.

처음 그녀를 만난 건, 정말이지 '우연'이었다. 발령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동네 지리에 눈이 어둡던 나는 퇴근 길에 버스를 반대 방향으로 타게 되었고 방문하지 않아도 될 정류장에 내리게 된 것이다. 그리고 길을 건너, 왔던 방향으로 다시 돌아가려는데... 투명한 유리 속 포근한 빵들을 포장하고 있는 그녀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리듯 자연스럽게 그 빵집에 들어갔다. 그녀는 나에게 "어서 오세요."라고 말했는데 순간 나는 정말 시간이 멈추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맹세코 난생처음 겪는 감정이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퇴근 길에 매일, 일부러 버스를 반대 방향으로 타게 되었고 그렇게 한 번의 '우연'을 매일 반복하며, '인연'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인연'이란 무엇일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며 가만히 지금 내 곁에 있는 것들을 바라본다. 내가 지금 있는 여기, 입고 있는 옷, 손에 들고 있는 컵, 내가 숨 쉬는 공기, 지금 막 나에게 도착한 메시지까지. 그러니까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수많은 경로를 거쳐 '우연'히 나에게 흘러와 나와 '인연'이 닿은 것들이겠지. 그렇다면 지금 내 곁에 있는 것들은 '우연'일까 '인연'일까? ...그녀와 나는 정말 '인연'이 될 수 있을까? 매일 그녀가 일하는 빵집에 들르기를 벌써 세 달째, 빵을 사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못하는 소심한 나이기에 '인연'이라는 단어에 집착해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고민 끝에 나는 드디어 내일 그녀에게 말을 걸어보기로 한다.

그녀 때문에, 그날따라 초조한 마음이 들었던 것 같다. 연신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며 퇴근 시간을 기다리면서도 또 두려워했다. 오늘 그녀에게 말을 걸지 못한다면 나는 아마도 다시는 그 빵집을 가지 못할 것이고, 평생 스스로를 저주하고 원망하리라. 그렇게 나는 몇 번이고 마음을 곱씹으며 다시, 사막 같던 건물을 벗어나 부지런히 길을 걷는다. "저기, 죄송하지만 언제 저랑 차 한잔...", "안녕하세요. 제가 사실은 드릴 말씀이 있는데 시간을 좀 내주실 수...", "언제 이 빵 만드는 방법을 좀 가르쳐주실 수..." 누가 보면 정말 한심하겠지만 온종일 고민 끝에 고른 말은... 

"어서 오세요." 빵집 문을 열고 들어선 나에게 말을 건네온 사람은, 그녀가 아니었다. 벙찐 표정으로 서 있는 나를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낯선 사람. "여기에서 일하시던 분은..." "아, 그 분이요? 어제 그만 두시고, 오늘 제가 새로 왔습니다. 무슨 일 있으신가요?" "아, 아니요. 실례했습니다." 빵집 문을 열고 다급히 차가운 거리로 도망쳐 나왔다. '우연'인지 '인연'인지를 고민하는 시간을 하루만 줄였어도, 그녀를 볼 마지막 기회인 줄도 모르고, 바보같이 나는 그렇게 그녀를 놓치고 만 것이다. 터덜터덜 걸어가며 나는 나 자신에게 오만 가지 욕을 퍼부었다. 병신 같은 놈... 너 같은 건 정말 구제불능이다...

그때였다. "오늘도 빵 사러 오셨나봐요." 내 앞에서 반갑게 말을 걸어오는 사람, 그녀였다. 그 순간 나는 혹시 내 앞에 서있는 그녀가 환상은 아닐까 잠시 고민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녀 입에서 하얗게 새어나와 제각각 흩어지는 입김을 보고 환상이 아님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이윽고, 그녀를 향해 그토록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꺼내게 된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우리는 '필연'인 것 같아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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