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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직유 Dec 28. 2022

저기 혹시 카멜레온이세요?

나는 누구일까?

나는 누구인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고자 했지만, 고민을 위해 자리에 앉기까지 참 많은 시간이 걸렸다. 어려운 질문 이어서일까, 답할 준비가 되지 않아서일까, 질문에 마주하기를 미루고 미루다 지금이 되어버렸다. 나는 누구일까 생각했을 때 단번에 떠오른 인상은, 나답지 못하게 사는 사람이었다. 남에게 맞추고, 상황에 맞추며, 남들과 달라 보이지 않기 위해 애쓰는 사람. 하지만 나를 찾아가는 글쓰기를 통해 안쓰럽고 가여운 나도 만났지만, 단단하고 아름다운 나도 만났으니, 지금은 좀 다르게 바라보고 싶다. '나다움'은 무엇일까?


주위 환경에 따라 변하는 카멜레온

나는 주위 환경에 정말 많은 영향을 받는다. 주위 사람에게, 분위기에, 날씨에 하나하나 일일이 다 영향을 받는 아주 예민한 사람이다. 사투리 쓰는 친구와 함께 있으면 나도 모르는 사이 표준어도 사투리도 아닌 이상한 말투가 돼버리고, 주위 사람의 감정에 금세 전염되어 잘 웃고 운다. 주위 사람의 감정에 빠르게 반응하다 보니, 상대가 어떤 감정인지, 어떤 기분인지를 빠르게 알아차리는 편이고, 그 눈치는 내 태도를 상황에 맞게 변화시킨다. 일종의 처세술인 셈이다. 또 열전도율이 높은 민감한 몸이라 주위 온도가 조금만 높아지면 땀이 나고, 온도가 내려가면 금세 몸이 얼음장이 되어버린다. 사시사철 겉옷을 입었다 벗었다 아주 부산스럽다. 자연스레 날씨와 계절에도 영향을 많이 받는데, 남들은 봄과 가을에만 '봄 타나 봐', '가을 타나 봐' 하지만, 나는 24 절기를 탄다. 아주 피곤한 일이지만, 그래도 예민하고 민감한 것이 나쁜 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남들이 느끼지 못하는 다양한 감정과 감각들을 섬세하게 느낄 수 있어서, 행복과 기쁨, 충만함과 황홀함의 정도도 다채롭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온도에 따라, 함께하는 사람에 따라, 또 그 사람의 기분에 따라 변하는 나는 전생에 카멜레온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온실 속 잡초

나는 나를 참 아꼈다. 혹여 비바람에 감기 들지 않을까, 굴러가는 낙엽에 다치지 않을까 염려하며 애지중지 아꼈다. '이 사람은 너무 말을 거칠게 해! 친하게 지내면 물들겠어!', '이 사람은 너무 술을 좋아해! 함께하다간 인생을 허비해 버리겠어!', '여기는 너무 경쟁이 치열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힘들겠어!', '밥을 안 먹었다고??? 그러다 쓰러져! 큰일난다구!' 그랬다. 나는 나를 정말 아꼈다. 혹여 상처받지는 않을까, 잘못된 길로 가면 어쩌나. 나의 단단함을 믿기보다, 나의 유약함을 걱정했다. 어쩌다 온실 속 화초처럼 나 자신을 애지중지하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사실 나는 잡초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간섭과 통제를 죽기보다 싫어했고, 누군가가 나를 판단하고 통제하려 하면 보란 듯이 반대의 선택을 하고야 마는 뿌리 깊은 잡초. 주위에 아무리 거센 비바람이 불어도 하고 싶은 건 꼭 해야만 직성이 풀리고, 예쁘게 다듬어지기보다는 거칠게 이리저리 제멋대로 뻗친, 그야말로 잡초 같은 아이였다. 그래도 여린 면이 없는 건 아니니 잡초보다는 들꽃이 나으려나? 거센 비바람과 온갖 곤충들의 공격을 견뎌낼 때 비로소 강인함이 빛을 발하는 아이인데, 스스로 자신을 온실 속에 가두고 '넌 약해, 세상은 위험해'라고 외쳤으니 얼마나 답답했을까. 이제라도 본래 성질을 깨달았으니, 온실 밖에서 제대로 부딪히며 살아보려 한다.


홍익인간

따뜻한 오지랖으로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고자 한다. 타고난 오지랖 반, 살면서 키워낸 넉살 반으로 주위를 챙기며 살아가고 있다. 소외된 사람을 가만두고 보지 못하고, 우울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사람에게 마음이 쏠린다. 기왕이면 내 주위 사람들이 나와 함께할 때 덜 울고, 더 웃길 바란다. 누군가에게는 나의 오지랖이 부담스러움이나 거부감으로 느껴질 수 있다는 걸 안다. 하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따뜻함과 위로로 느껴질 테니, 나의 손길이 필요한 이들을 위해 홍익인간의 정신으로 선한 오지랖을 이어 가려한다.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 먹어봐야 아는 똥고집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고. 뭐든 직접 해봐야 직성이 풀린다. 주위 모두가 똥이라며 만류해도, 된장일지 모른다는 일말의 희망(?) 하나로 기어이 똥을 찍어 먹고야 마는 똥고집이다. 대체로 직접 경험해보기 전까지는 남의 말을 잘 안 믿는다. 내가 가지고 있는 선입견에 힘을 실어주는 이야기라면 수용하지만, 반대되는 경우엔 고막을 닫아버린다. 쉬운 길을 두고 멀리 돌아가는 삶이지만 별수 없다. 똥을 음미하며 사는 수밖에. 나중에 똥 맛을 구별하는 날이 온다면, 똥 맛 전문가라는 타이틀로 강의를 하게 될지도 모르지 않나? 타고난 성정을 거스르려 애쓰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살아보려 한다.


배움 열정가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배우는 데에 주저함이 없고, 배우는 것 자체를 즐거워한다. 하지만 욕심이 많아 이것저것 곁다리를 걸치고 있다가, 죽 끓는 변덕으로 끝을 맺지 못해 제대로 할 줄 아는 건 하나도 없다. 그저 얕게라도 많은 것들을 경험했음에 감사하며 살뿐이다. 그동안은 타고난 성정에 따라 변덕 부리며 살았는데, 나에 대해서만큼은 깊이 있게 배우고 알고 싶어졌다. 나에 대한 공부는 하면 할수록 재미있고 더 알고 싶어 진다. 어느새 올해의 3분의 1이 지나갔다. 남은 3분의 2 동안 나는 나에 대해 얼마만큼 알 수 있을까? 부디 변덕이 기승을 부려도 끝까지 나를 공부하겠다고, 우선순위를 결코 바꾸지 않겠노라고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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