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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수연 Sep 22. 2022

눈물의 첫 글쓰기 수업

삶을 가꾸는 글쓰기 특강 #1

  브런치에 글쓰기를 시작한 이후로, 글쓰기에 대한 욕심이 생겼다. 마침 인근 도서관에서 '글쓰기 특강'을 한다는 정보를 얻고 수강 신청을 했다. 첫 수업이 있는 날이었다. 도서관의 주차공간이 협소하여, 도서관 주위를 계속 돌다가 (불법) 주차를 했다. 수업 시간을 딱 1분 남기고 강의실에 도착했다.


"아직 1분 남았네요. 지금 열심히 오고 계시는 분들을 위해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선생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후, 정말로 딱 1분 뒤에 수업을 시작하셨다. 따뜻한 단호함이라고 해야 하나? 인자하면서도 강단 있어 보이는 첫인상과 매우 어울리는 첫마디 말과 행동이었다. 선생님께서 준비해오신 빛바랜 자료는 선생님의 경력과 성실함을 증명해주었다. 7~8년 전, 한 수강생이 선생님과 함께 한 글쓰기 수업에 대해 쓴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글을 읽어주셨다. 그런데 이 글을 들으면서 눈물이 날 것 같아 당황스러웠다(1차 눈물 어택). 내가 울컥했던 부분을 더듬어 보자면...


"민주화 운동 경험에 대해 쓴 글을 읽는 그녀의 목소리가 떨린다. 순간 교실에 있는 우리 모두가 80년대 민주화 운동을 했던 그날 그 장소로 간다. 함께 눈시울을 붉힌다."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것이다. 글쓰기가 가지는 치유력에 대해서. 글쓰기는 분명 어렵고 힘들지만, 나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써보는 과정 자체가 나를 치유하기도 한다. 그런데 만약 내 글을 읽고 공감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더 큰 치유와 위로가 된다. 그래서 눈물이 났던 것 같다. 아마도 나의 1차 눈물 어택에는 어떤 부러움과 기대가 있었으리라. '글쓰기 동지들'에 관한 것 말이다.


  교수학습이론으로 치자면 일종의 동기 부여가 이렇게 감동적으로 끝이 났다. 이다음은 학습 목표 제시! 우리는 3주 뒤에 우리가 쓴 시로 도서관에 시화전을 열어야 한다고 한다. 이런... 난 산문적 인간이라 시 쓰기가 제일 어려운데... 선생님께서 이런 내 마음을 눈치채셨는지, 매우 쉬운 시 한 편을 소개해주셨다.


엄마의 런닝구
                          - 배한권

작은 누나가 엄마 보고
엄마 런닝구 다 떨어졌다.
한 개 사라 한다.
엄마는 옷 입으마 안 보인다고
떨어졌는 걸 그대로 입는다.

런닝구 구멍이 콩 만하게
뚫어져 있는 줄 알았는데
대지비만하게 뚫어져 있다.
아버지는 그걸 보고
런닝구를 쭉쭉 쨌다.

엄마는
와 이카노.
너무 째마 걸레도 못 한다 한다.
엄마는 새 걸로 갈아입고
째진 런닝구를 보시더니
두 번 더 입을 수 있을 낀데 한다.

- 어린이 시 모음집 <엄마의 런닝구>(한국글쓰기연구회 엮음, 보리, 1995)


  이것은 당시 초등학생이 쓴 시로써, 교재에 잘 쓴 시의 표본으로 아주 많이 인용된다고 한다. 엄마의 런닝구를 소재로 있었던 일을 담담하게 그려냈을 뿐인데, 이 짧은 시 안에서 이 가족이 다 드러난다. '작은 누나'가 있는 걸로 보아, 시적 화자는 남자아이이고 가족은 최소 5명이다. 엄마의 런닝구 구멍을 발견한 작은 누나, 런닝구 하나도 아까워하는 엄마, 그런 엄마의 궁상맞음이 마음에 들지 않아 런닝구를 찢어버리는 아빠, 그 속에 느껴지는 가족 간의 사랑. 선생님께서 좋은 시란 이런 것이라고 하셨다. 쉽게 읽히지만 그 속의 정서가 읽는 사람에게 전달되는 것. 단지 추상적인 이미지만 둥둥 떠다니는 것이 아니라, 씨실과 날실이 어우러져 천이 만들어지는 것처럼 이미지들이 잘 엮여있어야 한다고 하셨다.



  '엄마의 런닝구'를 읽고 잠시 우리 엄마는 런닝구는 어떻게 생겼었나 생각하는 와중에, 내 책상 위에 백지가 놓였다. 선생님께서 우리가 외우고 있는 시를 한 구절이라도 좋으니 써보라고 하신다. 갑자기 심장이 떨린다. 눈앞에 있는 스마트폰을 검색하고 싶은 충동을 꾹 누르고... 난 조용히 (가수 '마야'가 아닌)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적었다. 입 밖으로 나오려는 멜로디를 꾹 삼키면서... 5분 정도 지난 후, 한 명씩 돌아가며 발표를 했다.


  '나태주의 풀꽃', '윤동주의 서시', '김소월의 엄마야 누나야'까지 생각보다 다양한 시가 나왔다. 어떤 분은 본인이 시 낭송을 하는 사람이라고 간략히 소개한 후, '정현종의 방문객'이라는 시를 낭송하셨다. 이 분을 통해 나는 처음으로 시를 '소리 내어 읽는 것'과 '낭송하는 것'은 뭔가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분의 목소리는 내가 어릴 때 우리 할머니가 틀어두신 '명상의 시간'이라는 테이프를 상기시켰다. 그리고 이 목소리와 이 시와 이 수업 분위기는 나에게 이유 모를 2차 눈물 어택을 선사했다.


방문객
                          - 정현종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 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 정현종, <광휘의 속삭임> (문학과 지성사, 2008)


  내 앞에 계신 분의 차례가 되었다. 이 분께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시가 떠오르지 않아서 그냥 즉석으로 시를 지어보았다고 한다. 제목은 시계. 멈춰버린 시계를 고치러 가면서, 곧 요양 병원에 들어가시는 엄마의 멈춰진 시간이 떠올랐다는 내용의 시였다. '요양 병원'이라는 단어를 내뱉으면서부터 그분이 울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나도 왈칵 눈물이 쏟아질 뻔했는데, 꾹 참았다(3차 초강력 눈물 어택). 참 다행이었다. 그다음 차례가 나였기 때문이다. 눈물을 흘리면서 김소월(마야)의 진달래꽃을 읽고(부르고) 싶진 않았다.


  시인으로 등단하신 선생님께서 자신의 시를 낭송하는 것으로 발표는 마무리되었다. "이 시가 2년 전에 저에게 왔어요", 혹은 "이곳이 이 시가 태어난 장소예요"와 같은 시적인 표현으로 시작 배경에 대한 설명도 해주셨다. 또, 시를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한 줄이라도 쓰는 게 중요하다고 하셨다. "물 한 바가지를 부으면, 옆으로 튀는 물도 있지만 물길이 생기죠? 그러니 어쨌든 물을 부어야 해요."하고 말씀하셨다. 이 비유로써 선생님께서는 지적 혹은 시적 권위를 지키셨고, 시 쓰기 과제의 정당성을 확보하셨다.


  이렇게 해서 글쓰기 수업인지 집단 상담인지 조금 헷갈렸으며, 세 번 울컥했던 첫 수업이 끝났다. 정현종 시인의 말대로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열네 개의 소우주가 만났으니까. 열네 쌍의 과거, 현재, 미래가 함께 왔으니까. 앞으로 나누게 될, 그들의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궁금하다. 나에게는 열네 명의 글쓰기 동지이자, 시인이자, 작가이자, 독자이기도 한 사람들이 생겼다. 그리고 시를 써야하는 숙제도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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