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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벨라Lee Sep 12. 2024

내 글씨가 어때서 그러니?

브런치작가가 되고 두 달 반쯤 되었을 때 필사를 시작했다. 아무래도 글을 정기적으로 쓰고 독서도 매일 하다 보니 자연스레 필사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마침 따쓰해(따라 쓰기만 해도 글이 좋아진다_글밥 저) 필사단을 모집하고 있어 냉큼 지원한 게 된 거다. 규칙은 책을 각자 구입한 뒤 필사한 사진을 찍어 인스타에 올리고, 카카오톡 오픈 채팅방에 해당 링크를 남겨 60일간 인증을 하면 되는 일이었다. 생각보다 방법이 번거롭지 않았고 마침 인스타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어리바리한 상태였는데 매일 인증하다 보면 플랫폼 적응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또 매일 쓰는 성실함을  나 스스로 시험해 보는 기회도 될  있기에 기대감과 즐거운 마음에 꽤나 들떠있었다. 실제로 60일간 난 하루도 빼놓지 않고 필사인증을 완료했고 타임스탬프가 꾸욱 찍혀있는 인스타의 사진들을 보니 뿌듯함 마음에 나 자신이 참 기특했다.


필사에 재미가 들려 다음은 김혜자 배우님의 [생에 감사해]를 필사하기로 했다. 워낙 대배우시고 봉사도 많이 다니시는 고운 마음의 소유자가 쓰신 글이 어떨지 참으로 궁금해서였다. 이 책은 매일 마음을 가다듬고 단정하게 만드는 힘이 있어서인지 필사할 때마다 차분해지는 그 느낌이 좋았다. 그렇게 이 책도 필사를 완료했고 이제 하루라도 필사를 하지 않으면 왠지 모를 허전함에 온종일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동동거리고 다닐 지경이었다. 필사하는 그 몇십 분이 내겐 힐링이자 너무 소중한 시간이 되어버렸다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내가 좋으면 매일 하는 일도 지겹거나 귀찮아하지 않는 자발적 모습을 보고 한가지 느낀 점이 있었다. 이는 아이에게도 적용해야지 하는 마음. 공부도, 다른 일도 마찬가지로 본인의 마음이 동하면 하지 말라해도 할 것이니 별로 원치 않는다면 굳이 강요하지 않겠다. 실랑이할 시간에 차라리 딸이 좋아하는 망고 스무디나 마시러 카페에  수다나 한 판 신나게 떨고 오는 게 아이나 나의 정신건강, 둘의 관계유지에 더 도움 되는 플러스적 행동이라는 것을 명심하기로 했다. 필사로 육아의 깨달음까지 얻고 이게 웬 일거다득의 고마운 일인가 모르겠다.


필사가 이리도 고마운데 어느 날부터 잿밥에 더 신경 쓰는 날이 오면서 불만이 불쑥 튀어나와 날 삐그덕거리게 했다. 어느 날 인스타에서 클래스유 미꽃체 광고가 뜨길래 유심히 보다가 허걱, 너무나 마음에 드는 글씨체에 넋이 나가버리고 말았다. 행동파 또 어디 안 가지, 곧장 3개월 결제를 마치고 준비물인 미꽃체 연습노트와 펜세트까지 모두 구입했다. 휘갈겨 쓰는 내 글씨와는 달리 정말 꽃잎 하나하나가 글씨로 변한 듯한 반듯하고 곱디고운 자태가 정말 아름다웠다. 사람에게 반한 적은 있어도 글씨체에 반하기는 또 처음이었다.


외출한 어느 날 심심한 마음에 첫 강의 영상을 틀어서 훑어보는 느낌으로 보았다. 자음/모음 쓰기를 모눈종이에 천천히 써 내려가는 걸 보고 있는데 나도 모르게 졸음이 밀려오는 거다.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겨우 20분쯤 봤나, 그냥 끄고 다른 일을 했다. 그리고 3달 동안 한 번을 켜보지도 않다가 그대로 기간만료가 되었다.  필사를 열심히 하던 그 꾸준함은 어디로 가고 글씨체 연습은 한 번을 끝으로 허망하게 마무리되었나? 원인을 짚어보니 그냥 글쓰기가 싫었다. 어느 날부터는 기간만료일을 거꾸로 세 나가면서도 강의는 듣지 않았다. 돈을 날리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한 강의도 더 들으려 하지 않은 이유는 그냥 하고 싶지 않았다. 그 지루하고 따분한 작업을 3달간 지속할 마음이 없었다. 그러면 차라리 부분 환불이라도 받을걸 이게 뭐 하는 건가 싶었다. 


미꽃체에 밀려 갑자기 내 글씨가 못나게 보인 순간부터 필사를 하는 건지 글씨를 이쁘게 쓰는 인증을 하고 있는 건지 그저 또박또박 쓰는 데에만 온 심혈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필사 내용은 안중에도 없고 그저 미꽃체에 가까워지고 싶어 펜에 힘을 주어 꾹꾹 눌러썼다. 강의도 안 들으면서 또 미꽃체같이 쓰고는 싶었다. 알 수 없는 이상한 마음으로 계속 글씨체에 집착했고 손은 아프고 신경질이 나고 막상 쓰고 나서도 밸런스가 맞지 않아 전체적으로 못생겨 보였다. 필사까지 재미가 없어지려고 하는 순간, 정신을 차린 계기가 있었다. 바로 손이 풀리면서 글씨가 흘려지는 때가 있었는데 에잇 오늘 필사는 그냥 손에 힘주지 말고 편할 대로 대충 쓰자며 내 멋대로 써버렸다. 그랬더니 내 본래 필체가 나왔고 마무리하고 노트를 보니 균형도 잘 맞고 예뻐 보였다. 그래, 내 글씨 이렇게 괜찮았지, 내 글씨 맘에 든다고 딸아이가 무척 좋아해 줬는데 어느 날 갑자기 미꽃체에 홀려 한눈을 팔다가 나만의 오래된 필체를 잃어버릴 뻔했다는 사실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다운 것이 때로는 질리고 고치고 변화시키고 싶을 때가 분명 있다. 나라는 존재가 내게는 이제 너무 뻔해서 지겨울 때가 있다. 그럴 때 다른 모습으로 바꿔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내 고유함이, 개성이 잃어가는 방향인지 아닌지 번쯤은 확인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무디게, 둥글게 변해 남들과 비슷비슷한  모습도 괜찮다면 상관없다. 하지만 오로지 나였기 때문에 날 사랑했던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그로 인해 인정받았고 그런 자신을 사랑했던 날들이 있었다면 조금만 더 그대로의 내 모습을 지켜줘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서점에 갔더니 미꽃체 셀프 연습 책도 판매하는 걸 보고 무의식적으로 덜컥 집어 들었다. 그러다 아차, 다시 내려놓으며 혼자 겸연쩍게 웃었다. '구불구불한 내 글씨체야 내가 또 잠시 한 눈 팔았구나, 미안' 사과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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