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벨라Lee Apr 08. 2024

강아지에게 쩔쩔매는 남편

강강약약

주말은 밀크의 2주 만의 산책이자 목욕하는 날. 오늘은 볕도 바람도 좋은 날이라 밀크에게 꽃구경도 시켜줄 겸 산책 담당자인 신랑이 목줄을 하고 데리고 나갔다. 시아나 내가 없으면 아빠랑은 산책을 길게 안 나가는 걸 알기에 오늘도 5분이 안돼 집에 돌아오겠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웬걸, 15분이 지나도 현관문이 아직 조용하다. 20분쯤 되자 산책을 마친 밀크는 목줄이 풀리기가 무섭게 아빠의 손에 이끌려 욕조로 직행했다. 밀크의 목욕도 담당하고 있는 신랑은 자길 꺼내달라며 끼잉끼잉, 누가 꼬집은 것처럼 시끄럽게 울어대는 밀크를 달래려 간식 하나를 챙겨 욕실로 들어간다. 전형적인 T형 아빠가 본인에게는 저렇게나 자상하고 세심하다는 걸 밀크는 과연 알기나 할, 모르겠다.


목욕할 동안은 언제 그랬냐는 듯 세상 조용한 밀크는 건조도 담당하고 있는 신랑의 손에 들린 커다란 수건 속에 고이 싸여 욕실 밖으로 나왔다. 이제 전쟁 시작이다. 두터운 손과 뻣뻣한 동작으로 자기 몸을 수건으로 투박하게 비벼대는 것이 너무 싫은  밀크는 슬슬 이를 드러내며 아빠에게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낌새가 좋지 않은 것을 직감한 신랑은 물기를 수건으로 꾹꾹 몇 번 더 누르고 두세 번 얼굴과 몸통을 세게 문지르고는 밀크를 건조기에 후다닥 집어넣었다. 그러나 건조기를 싫어하는 밀크는 극도로 화가 나서는 건조기 문 입구를 바라보고 귓속이 따끔할 정도의 데시벨로, 욕실에서의 울부짖음과는 또 다른 분노의 목소리를 내며 하소연을 했다. 밀크의 요구라면 다 들어주는 신랑은 "요새 밀크가 저 건조기를 부쩍 더 싫어하는 같네."라며 이야기를 꺼냈다. 하지만 사람 편하자고 구입한 건조기를 앞에 두고 이제 와서 일일이 드라이로 말리는 수고로움을 상상하니, 아무리 내 담당은 아니더라도 그렇게 하는 건 좀 별로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냐오냐하는 아빠의 성격을 알고 자꾸 생떼를 쓰는 녀석임을 알기에 "그래도 자꾸 해달라는 대로 해주면 나중에 우리가 너무 힘들어지니 너무 신경 쓰지 ."라고 신랑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사실 신랑은 나만 아니었음 건조기에서 당장 밀크를 빼내 드라이기로 직접 말려주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내가 강경한 태도를 취하니 저 멀리 소파 쪽으로 걸어가면서 '에이 나도 모르겠다'며 한숨을 쉬었다. 아니 저렇게도 밀크가 안쓰러울까 싶어 풉, 웃음이 나왔다. 정작 자기가 낳은 시아에게는 객관적이고 냉정한 조언도 잘만 하 이성적인 사람이, 자그마한 강아지에게는 저리도 쩔쩔매는 모습이 참 아이러니했다.

꺼내라고 난리치다 바닥의 디딤판까지 뒤엎은 밀크


신랑이 밀크에게 간식을 너무 자주 주는 것 같아 내심 배탈이라도 나면 어쩌나 싶던 어느 날, 강아지가 밥을 안 먹고 기운이 하나도 없이 축 처져있길래 급하게 병원을 데려가니 장염증세가 있다며 물 빼고는 하루 동안 아무것도 먹이지 말라는 의사의 처방을 받았다. 초소형견이라 하루 급여하는 간식의 양이 적은데 출근한다고 주고 퇴근했다고 주고 밥이랑 섞어먹으라고 주고 아주 신나게 퍼주더니 이렇게 된 거 아니냐며 그동안 좀 불만이던 부분을 신랑에게 이야기했다. 그전에 밀크가 걱정되어하 내 말들을 별로 귀담아듣지 않더니, 탈이 나 주사를 맞고 금식과 약처방까지 받으니 이제야 좀 정신을 차리는 듯 보였다. 가관인 건 병원을 나서며 아픈 밀크를 자기 품에 꼭 안더니 "밀크야, 많이 아팠쪄? 배가 아야 하지? 내일까지는 굶어야 된대요. 빨리 나아야 맘마 먹지."라고 귀에다 속삭이는 게 아닌가. 내가 아파도 저런 말투는 들어본 적 없고 시아가 아파도 해준 적 없는 '... 쪄' 화법을 강아지에게는 마구 쏟아내다니. 사람이 저렇게 변할 수 있다고?

이후 밀크는 금세 건강을 되찾았고 밥도 다시 잘 먹게 되었다. 당분간 간식은 2주간 금지고 그 이후엔 하루 두 번만 주라고 신랑을 단단히 단속시켰다. 웬일로 2주는 잘 지켰는데 근신 기간이 끝나니 아니나 다를까 간식을 다시 줘도 되냐고 물었다.  시작이다. 하지만 약속은 약속이니 그러라고 오케이를 했고 신랑은 정말 아침, 저녁 두 번만 칼같이 간식을 주었다.


그러나 이게 끝이 아니었다. 옵션이 생긴 것이다. 식사 시간에 밀크가 우리를 슬픈 눈망울로 빤히 쳐다보고 있으면 '그래 너도 얼마나 먹고 싶겠니, 너도 먹고살아야지.'라고 하면서 간식을 툭 던져주는 거다. 이게 끝이면 좋았겠지만, 본인이 고생해서 목욕시켜 놓고는 밀크 네가 건조기에서 잘 버텨준 거라며 잘했다고 주고, 가족 외출하는 동안 집 잘 지키라며 주고, 털 빗는 동안 수고했다며 주고, 간식을 줘야 하는 이유는 끝이 없었다. 몇 달 전의 굳은 결심은 어디로 가고 자제력 만렙의 이 남자는 도대체 왜 밀크에게는 한없이 풀어지는 것일까. 신랑 때문에 나라도 간식을 안 줘야 급여 횟수를 줄일 있다 보니 하루종일 간식 한 개도 주지 못했고 밀크는 나와 점점 멀어지는 것만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가 외출에서 돌아오면 밀크는 제일 먼저 신랑 다리를 툭툭치고 낑낑 대고 뱅글뱅글 돌면서 아주 난리가 난다. 신랑은 나를 제치고 자기에게 애교 부리는 밀크가 이뻐 죽겠나 보다. 흐뭇한 미소를 띠며 '아이고 아빠 온 게 그렇게 좋아요? 아주 난리가 났네. 알았어, 알았어 까까 줄게?'라며 간식을 쓰윽 던져준다. 내가 졌다, 둘의 사랑 부디 영원하길.


원래 신랑은 강자에게는 강하고 약자에게는 약한 사람이라는 건 연애시절부터 알고 있긴 했다. 내가 공주병 증세가 나타날 때면 제발 자제하라며 따끔하게 충고해 주었고, 실수연발로 학교나 회사에서 괴로워할 때엔 절대 나를 타박하지 않고 그럴 수도 있고 다 괜찮아질 거라며 몇 날 며칠을 곁에서, 전화로 위로해 주었다. 지금도 내가 기세등등할 때에는 이전의 글들에서처럼 충격요법을 주곤 했고 육아에 지치고 힘들거나 인간관계로 스트레스가 심할 때에는 슬쩍 외식하자는 말을 건네며 맛있는 음식으로 상처 난 마음을 풀어주었다. 상냥하고 다정다감하고 부드러운 성격의 남자는 아니지만 강강약약의 정의로운 면이 있어 지금까지 큰 트러블 없이 지내왔던 것 같다. 강아지에게 한없이 약해지는 것도 밀크는 우리 집에서 가장 작고 약한 힘없는 존재라고 생각하기에 그런 것 같다. 겉으로는 무뚝뚝해 보이지만 마음이 엄청 여린 사람이라 최약자를 배려하고 아껴주려는 착한 마음일 테니 이해해 줘야겠다. 산책, 목욕, 사료 구입과 급식까지 책임지는 고마운 신랑이 간식 좀 강아지에게 자주 준다고 해 타박까지 할 일은 아니었던 것 같다. 솔직히 밀크가 나보다 아빠를 더 좋아한다 해도 할 말은 없으니까. 그래, 나에겐 시아가 있으니 신랑에겐 밀크를 넘기도록 하자.


엄마, 싸랑해요♡

엇, 근데 왼쪽 얼굴이 왠지 찌릿찌릿하다. 눈을 돌려보니 밀크가 나에게 사랑의 눈빛 레이저를 쏘며 앉아 있는 게 아닌가. 어쩌지, 이젠 진짜 신랑이랑 맺어주려고 했는데, 진정한 사랑은 아직도 엄마인 게냐? 그래, 아직은 안 되겠다. 첫사랑은 영원히 못 잊는 법이니 네 마음 충분히 존중해 줄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