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 바람의 부작용
가을의 갑자기 불어오는 찬 바람은 잠들어 있던 내 머릿속 기억들을 깨운다. 그래서 그 안 아주 깊숙한 곳에 침전되어 있던 기억까지 공중으로 떠오르게 한다. 이를테면 지나간 옛 연인과의 추억 같은 것들을.
모든 감각들이 곤두서는 가을이라는 계절을 핑계 삼아 추억에 빠져보았다. 사실 빠져보자! 한 건 아니다. 저절로 빠져들게 되었다. 앞서 말했듯이 다 찬바람 탓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모든 흔적들이 사라져 간다. 오늘은 그에게 선물 받았던 물건이 영영 나에게서 사라졌다. 커피를 좋아하는 나를 위해 사준 칼리타 드리퍼가 깨졌다. 더 웃긴 건 내가 깨트린 게 아니다. 엄마가 깨트렸고, 같은 브랜드의 다른 모양의 드리퍼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당혹스러웠다. 갑작스럽게 이별 통보를 받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난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는데!
그와 헤어진지는 꽤 됐지만 그 드리퍼와는 헤어질 준비가 안 되어 있었던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물건이었는데...... 이렇게 또 억지로 그와 관련된 물건, 흔적이 떨어져 나갔다.
하지만 아주 깨끗하게 흔적도 없이 모든 것이 사라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또 어느 가을날, 생각지도 못한 찬 바람이 불어와 쥐도 새도 모르게 숨어버린 기억들을 깨워 부르겠지. 그 기억들 중 좋았던 기억들을 선택해 되새기며 가을을 즐기겠지. 외로움을 즐기겠지.
여기서 끝나면 좋은데. 가을은 이 기억들을 통해 난데없이 누군가를 또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이게 바로 부작용이라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