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Inside Wisdom

한 해를 마무리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책

'신영복 옥중서간,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읽고

by Ann

매일매일 거의 비슷한 하루. 오랜만에 연락 온 친구가 "요즘 어때?"라고 물으면 별거 없다고 대답하는 하루하루. 그래서 지겹기도 한 일상. 그 생각이 내가 얼마나 부족하고 날이 뭉뚝한 사람인지 알게 해준다. 그래서 나에겐 수많은 번뇌와 괴로움이 있는 것이고 여전히 지혜롭지 못한 것이다.


'신영복'이라는 사람을 알게 됐다. 오로지 그의 글로서.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나는 나를 한 번 확 뒤집어 보는 기회를 갖게 됐다. 감옥이 아닌 이 자유로운 공간 속에서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신영복 작가님에 대해서는 인터넷 백과사전에 나오는 것 말고는 전혀 아는 것이 없다. 그는 통일 혁명당 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고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나에게는 생소한 사건이고 자세히 알지 못하는 사건이고, 신영복 작가님이 그 사건에 얼마큼 관여를 했고, 어떤 일을 행했는지도 알지 못한다. 단지 그로서는 억울할 수도 있겠구나 짐작할 뿐이다. 내가 역사 공부를 좀 더 해야 하는 동기가 되기도 했다.


그렇게 20년 동안 감옥에서 생활한 사람의 편지를 읽었다. 부모님께, 계수, 형수께, 형제들에게 보낸 편지였다. 읽으면서 충격을 느꼈다. 그에게서는 전혀 감옥의 그 어떤 것도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삭막하고 험악하고 차가운 교도소 안에서 어떻게 그런 글을 쓸 수 있었을까. 언제 그곳을 나가게 될지 모르는 희망 없는 그 시간들 속에서 어떻게 그렇게 따뜻하고 자상하고 때론 바짝 날이 선 자아 성찰의 글을 쓸 수 있었을까.



5월, 창밖의 몇 점 신록에 이따금 피곤한 시선을 기대어 쉬곤 합니다.



그는 답답하게 높이 솟은 교도소 담벼락 넘어의 것들까지 보는 사람이었다. 그 와중에 봄을, 꽃을 보는 사람이었고, 그 와중에 하얀 눈을 보는 사람이었다. 그의 편지에 적혀 있는 날씨에 대한, 계절에 대한 묘사들은 담담하고 담백한 것 같으면서도 아름다워서 감탄이 절로 나온다. 어떻게 그 시커먼 감옥 안에서 그런 섬세한 감성을 잃지 않을 수 있었을까.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15척 담은 봄도 넘기 어려운지 봄은 밖에 먼저 와 있었습니다. 우리는 한나절의 봄나들이를 맞아 저마다 잠자던 감성의 눈을 크게 뜨고 봄을 들이마시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수많은 편지에 매년 똑같은 계절인데도 늘 참신하면서도 다르게 묘사하는 그의 감성에 비하여 너무 늙고 메말라버린 내 감성이 부끄러웠다. 그저 매년 돌아오는 벚꽃이 예쁘고, 매년 내리는 눈이 예쁘다가 끝인 나의 게으르고 메마른 생각과 감성. 신영복 작가님의 묘사는 메말라가는 나의 감성에 떨어진 한 방울의 물이었다.








요즘 점점 더 무뎌지는 나를 발견한다. 말로 못할 정도다. 이것이 바로 몸이 아니라 마음이 늙어가는 증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가 들어도 절대 그렇게 되지 않겠다고 발버둥 치던 나는 어떤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서서히 주저앉아가고 있는 것만 같다. 자유로운 손과 발, 공간 속에서 자유롭게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더 안 하고 있고 오히려 '하기'를 거부하고 미뤄두고만 있다. 억압된 손과 발, 공간 속에서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 대해 아주 자유롭게 그리고 날카롭게 회의하고 성찰하는 그와는 다르게 말이다.



흙 한 줌보다 훨씬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는 내가 과연 꽃 한 송이라도 피울 수 있는지, 5월의 창가에서 나는 팬지꽃이 부끄럽습니다.



과연 감옥에 있는 무기징역수에게 미래란, 희망이란 있을 수 있을까? 감히 상상조차 못 하겠다. 그저 답답하고 살아야 할 이유, 의미를 찾고 찾다가 포기하고 주저앉아 시간만 흘려보내고 있을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결코 시간을 그렇게 보내지 않았다. 누가 봐도 절망적일 수 있는 1초가 1시간 같은 일상 속에서도 내면의 발전, 성숙을 위해 애쓰고 애썼다. 누구보다 길게 느껴질 그 시간들을 교도소 밖에 있는 그 어떤 사람들보다 정성스럽게 보내려 했다.



하는 일 없이 앉아서 땀만 흘리는 이곳의 여름이 몹시 부끄러운 것입니다만, 아무리 작고 하찮은 일이더라도, 새 손수건으로 먼저 창유리를 닦는 사람처럼, 무심한 일상사 하나라도 자못 맑은 정성으로 대한다면 훌륭한 '일'이란 우리의 진심 도처에서 발견되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는 책과 글쓰기와 서도 등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닦았다. 하지만 그는 채우기보다 덜어내려 했다고 책에서도 출소 후 인터뷰에서도 말했다. 그가 말하는 진짜 지식은 그저 알고만 있는 상태가 아니라 실제 생활에서도 스며 나올 수 있는 지식이다. 그동안 내가 읽어온 책의 지식들은 여전히 내 것이, 진짜 지식이 되지 못했음을 알게 된 기회였다. 벌써 아주 오래전에 아주 작은 일상이라도 천천히 정성스럽게 하자던 나의 다짐들이 물에 떨어진 한 방울 잉크처럼 옅게 흩어져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저는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결코 많은 책을 읽으려 하지 않습니다. 일체의 실천이 배제된 조건하에서는 책을 읽는 시간보다 차라리 책을 덮고 읽은 바를 되새기듯 생각하는 시간을 더 많이 가질 필요가 있다 싶습니다. 지식을 넓히기보다 생각을 높이려 함은 사침하여야 사무사 할 수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다짐했던 것보다 책을 읽지 못한 올해의 나를 돌아보면서 반성했다. 하지만 더욱 반성해야 할 것은 책을 읽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그저 많은 양의 책을 읽어내려 했던 욕심이었다. 읽은 책의 양에 비해 뭉뚝하기만 한 나의 내면의 지혜를 외면했던 그 마음이었다. 실천되지 못한 그 많은 다짐들이었다.


한 해를 마무리하고, 한 해를 맞이하는 이 시기에 읽기에 더없이 좋은 책이었다. 나는 한 해동안 무엇을 했는가. 그가 꽉 막힌 감옥 안에서 이렇게 많은 생각을 하고, 많은 글을 쓰고, 그것들을 책으로 만들어내는 동안 사방이 뚫린 자유로운 이 시공간 속에서 나는 무엇을 했는가. 무엇을 당당하게 내놓을 수 있는가. 한없이 부끄럽고 부끄럽다. 부끄러워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시간들이 이제야 부끄럽다.


이 책을 공기 청정기 삼아 내 속을 뒤집어 환기시켰다고 생각하고 싶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내 속을 한 바퀴 휙 훑고 지나간 것만 같다. 춥기보다는 시원하다.






<책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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