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nn Mar 09. 2020

오랜만에 걸었다.

오랜만에 걸었다. 겨울엔 추워서라고 핑계를 대고 걷지 못한 거였지만 더는 패딩 점퍼를 입지 않아도 되는 날씨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게으름을 피우느라 나오지를 못했다. 


글쓰기 선생님에게 글을 보내면서 짤막하게 마음을 털어놓았다. 제대로 쓰고 있는 건지, 가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고. 할 이야기가 많을 거라고 기대했는데 막상 쓰려고 보니 같은 말만 되풀이하고 있는 것 같다고. 


선생님에게서 다정하지만 단호한 메일이 왔다. 기획안과 목차를 다시 점검해보라고. 맞다, 기획안. 코로나 때문에 책 쓰기 수업이 미뤄지고 기획안을 보내드리지 못했다. 기획안 파일을 찾아 다시 열었다. 내가 처음 생각했던 의도와 나의 글은 어쩐지 어울리지 않았다. 기획안을 다시 보니 정답까지는 알 수는 없었지만, 지금까지 쓴 글들이 나의 의도와 어긋나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목차도 수정해야 할 것 같았다. 제목만 다른 반복되는 이야기들이었다.


기획안을 계속 점검해보아야 한다는 선생님의 말씀을 실천하지 못한 채 엉뚱한 방향으로 잘도 걸어가고 있었다. 조금은 허무했다. 진작 들여다봤어야 했는데 하는 후회도 했다. 나는 아직 책을 쓸 때가 아닌가? 하는 의심도 했다. 그런 마음을 끌어안은 채 걸으러 나갔다.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한산할 거로 생각했던 탄천 길에는 많은 사람이 나와 있었다. 하나같이 마스크를 쓰고 걷거나 뛰었다. 오리들도 그대로였다. 못 보던 종의 오리도 있었고 새 생명이 세상에 나와 작은 몸집을 물 위에 띄우고 열심히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나만 안 움직이고 있었구나. 


마스크 때문에 전보다 더 숨이 찼다. 벗었다 끼기를 반복하며 목적지까지 쉬지 않고 걸었다. 오랜만이라 같은 코스를 걸어도 조금 힘들지 않을까 했는데 아직은 거뜬했다. 처음 5분 동안은 무릎의 뼈가 접히지 않는 것처럼 약간의 불편함이 느껴졌지만, 곧 부드러워졌다. 


걸으면서 별생각은 하지 않았다. 옆에서 함께 걷는 동생에게 어제 만난 친구들과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를 했고, 말도 안 되는 농담을 했고 이상한 노래를 불렀다. 걷고 있다는 것도 잊은 채 열심히 떠들었더니 집에 거의 다 도착했다. 집 근처 경비실에 사는 뚜이의 언니로 추정되는 고양이를 보러 갔다가 곤히 자는 모습을 확인하고 뭉클한 마음으로 집에 왔다. 


다시 기획안을 열었다. 목차를 수정했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다시 한번 떠올렸다. 쉬울 거라 여겼던 기본적인 일들이 가장 어려운 것이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왔다. 처음부터 다시 점검하면서 써 봐야겠다.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새로운 것들을 담을 수 있을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책을 쓰기 시작했는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