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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NA Jun 30. 2020

을이지만 항상 을처럼 굴진 않겠다.

사과를 해야 할 때와 하지 않아도 될 때

 벌써 올해 반이 지났다. 이런 상황('코로나'라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충격)에도 성수기와 비수기가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이것이 업계 생리구나 싶기도 하다. 6월은 5월에 비해 한가했고 진행한 번역 건 규모도 작았다. 그렇기에 5월에 열심히 해놓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루하루는 거의 비슷한 일상인데, 마침 적당한 사건(?!)도 있어서 번역사로서의 2020년 상반기를 마무리하며 일에 대한 단상(短想)을 적어본다.


통역 대비 노트테이킹 연습

 사회생활, 즉 직장 생활은 해보았지만, 프리랜서로서의 사회생활은 또 조금 다른 것 같다. 좋은 의미로도, 나쁜 의미로도 정말 다양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 처음에는 의뢰를 받아서 번역 '서비스'를 제공하는 역할이니, 내가 의뢰인의 요구에 무조건 맞추어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코멘트나 컴플레인이 있을 때 일단은 사과를 하고 최대한 요구에 맞추어 번역물을 전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맞는 말이긴 하나, 좀 지내보니 항상 미안하다고 사과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내 잘못이 아닐 때, 어처구니없는 요구를 할 때, 나를 존중하지 않는 사람에게, 또는 번역에 대해 잘 모르고 하는 요구에 대해서 내가 먼저 무조건 사과를 하거나 그 요구에 응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내가 오역을 했다거나, 누락을 했을 때, 명백한 나의 실수인 경우에는 당연히 사과를 하고 제대로 된 결과물을 다시 전달해야 한다. 이럴 때는 고민 없이 제대로 사과하는 것도 중요하다. 내 실수를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이 앞으로의 내 커리어에 나쁜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항상 명심하고 내 실수를 인정하려고 노력한다. 

 다만, 프리랜서로서 서러운 것은 전자(사과할 필요가 없는 경우)의 상황이나 사람을 맞닥뜨렸을 때 함께 대변해 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에이전시가 중간에 있다고 해도 (직접 겪어보면 알겠지만) 완전한 내 편으로 생각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때 나는 일을 받아서 하는 입장이니 사과해야겠다고 생각을 하거나 상황에 휩쓸려 얼떨결에 사과를 해버리면 정말 내 잘못이 되어버리고 상대방은 더 의기양양해서 큰소리를 치더라. 

 

 얼마 전, 번역에 대해 전문적으로 알지 못하는 사람이 내 번역에 대해 엉망이라고 한 일이 있었다. 그 사람은 자신의 경험에만 비추어, 자신의 경험과 다르니 내가 틀렸다는 것이었다. 애초에 그 경험 자체가 틀렸다고는 생각해보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번역에 대해 전문적으로 알지 못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적어도 번역에 있어서는 자신보다 전문가인 사람을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무시하고 틀렸다고 주장하는 것이 문제다.

끝이 보이지 않던 번역을 마감했을 때의 희열

 의뢰인이 번역(통역도 마찬가지)에 대해 전문적으로 알 필요는 없다. 그러니까 전문가인 국제회의 통번역사에게 일을 맡기는 거니까. 그리고 의뢰인의 요구가 전문적인 관점에서 옳지 않다고 하더라고, 굳이 그것을 원한다면 맞춰서 해줄 수도 있다. 대신 그러려면 정중히 요구해야 한다. 억지를 부리면서 형편없는 번역사라고 비하할 것이 아니라 전후 사정과 함께 차분히 자신의 요구를 설명하면 된다. 

 그런데 이런 이성적인 대화 없이 무조건 자기가 알던 것과 다르다고 다짜고짜 화를 내는 사람에게는 논리적인 설명도 소용이 없고 더 나아가 사과도 소용이 없으며 할 필요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당장 일 하나 더 하는 것도 중요한데, 나는 이 일을 오래 할 수 있어야 한다. 전문적인 소양도 갖추고 있어야 하고 내가 갖춘 이 소양에 대한 프라이드도 있어야 한다. 이걸 무시하는 사람에게 언제 또 혹시 의뢰를 받을지 모른다는 이유로 나를 낮춰가며 참는 것이 과연 최선인가.

 이런 일이 있고 나서 그 날 하루 공치다시피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내가 옳다는 것을 아는데도 듣고 싶지 않은 말들을 듣고 나니 기운이 쭉 빠졌다.

위로가 되어주는 고냥이

  혼자 이러고 있다가는 쓸데없이 우울한 시간을 보낼 것 같아서 결국 동료들에게, 동기들에게 이야기했다.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의 위로가 큰 힘이 되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생각한다. 내가 잘못했을 때 실수를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이 나의 커리어에 흠이 가지 않듯이, 내가 잘못하지 않은 일에 대해 을이라고 해서 반드시 사과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고 사과하지 않는다고 해서 내 일이 줄어드는 것도 결코 아니리라. 그러니 을이라고 언제나 을처럼 굴지는 않겠다.

 앞으로도 이런 일이 얼마나 많을까. 아마 이보다 더한 일도 있겠지? 이런 일을 통해 하나씩 배워간다고 는 하지만, 이런 경험은 정말이지 되도록이면 안 하고 싶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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