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나로 돌아가는 섬
나오시마Ⅱ
지중미술관
무거운 공기가 몸을 눌러 잠을 깼다. 눈을 뜨니 어김없이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가 올 때 느낄 수 있는 적막함. 그 무겁고 침착하고 편안한 기분을 한껏 느꼈다. 이 기분은 결코 지루하지 않을 것이다. 오래도록 이 느긋함을 한껏 느끼고 싶다. 현주와 함께 어제처럼 테라스에 나가 비 오는 들판을 바라보았다. 어제보다 풀내음과 비 냄새가 진해졌다.
오늘은 지중미술관에 가보기로 했다. 지중미술관은 말 그대로 지중(地中), 곧 땅 아래에 세워진 미술관이다. 하늘에서 본다면 건물은 대부분 땅 속에 지어졌고, 가운데 세모 모양의 기둥이 뻥 뚫린 모양이다. 지하에 지어진 미술관 내 작품들은 대부분 인공의 빛이 아닌 자연의 빛을 통해 형태를 드러낸다. 자연의 빛이 흐르고 스미도록 건축이 작품에 맞게 설계되었다.
비가 개인 하늘은 여전히 희뿌얬고 해는 어디쯤 떠있는지 알 길이 없는 날. 스미는 볕도 그만큼 적어 관람을 하다 보면 지금이 몇 시인지 좀처럼 가늠이 되질 않았다. 어둡고 동시에 따스한 기분이 미술관을 걷는 내내 이어졌다. 마치 북향인 내 방의 오후처럼. 커튼을 치고 침대 깊숙이 누워 가습기 소리가 방을 메우는 동안, 시간은 사라졌고 별 것 아닌 소일거리들을 하는 시간을 나는 사랑했다. 주문하고 읽지 못한 책들을 뒤적이거나 이전의 일기장을 다시 읽는 시간들.
며칠 전에는 보물처럼 여기던 대학시절 다이어리를 보게 되었다. 무수한 계획과 스스로를 채찍 하는 말들이 가득했다. 참 힘주며 살았구나, 나는 지난날의 내가 기특해서 또 가여워서 웃음도 울음도 아닌 것을 지었다. 무엇이 그토록 간절했을까. 무엇이 그토록 두려웠을까.
열아홉의 아리스타
열아홉, 가난 속에 웅크리고 있던 나의 에너지는 바야흐로 대학교 입학과 함께 물을 만났다. 그 시절 많은 시간을 고민하고, 머무른 소중한 공간이 하나 있다. 내게 대학생 시절의 낭만이자 추억의 장소래도 유일무이할 <아리스타>라는 카페이다. 대학교에 입학하며 나는 자취하던 언니의 집으로 이사를 갔고 하교 후 달리 할 것이 없던 나는 아리스타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곤 했다.
마침 주인아저씨는 내가 다니는 대학교 인근의 대학교를 졸업하셨고, 그래서 나의 모교에서 제일 복사를 잘하는 아저씨도 알고 계셨고, 그 복사 아저씨가 상주하시던 모교의 도서관도 즐겨 다니셨다기에. 우리는 그렇게 나이를 넘나든 친구가 되었다. 아저씨는 내게 언제든지 꽂혀 있는 음반 중에서 아무거나 틀 수 있게 해 주셨고, 몇 년 뒤 호주로 워킹 홀리데이를 떠났을 때 내게 언제든지 카페에서 일한 레퍼런스가 필요하면 잘 거짓말을 해주겠다며 나의 기사도를 자처하기도 했다.
좋은 어른 친구가 있어서기도 했지만, 아리스타를 사랑했던 건 아마도 그곳에서 보낸 시간들 때문일 것이다. 열아홉의 나. 지금 생각해보면 머리가 지끈할 만큼이나 생각도 꿈도 많았다. 갑자기 넓어진 세상, 넓어진 꿈의 반경, 다양해진 친구들 속에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예술에 대한 애정이 컸지만 경제적인 이유로 관심사를 키울 수 없었던 나는 대학교 1학년 영화제 자원활동가를 시작으로 예술의 경계에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문화재단 기자단, 대학생 축제 기획 등 학기에 하나씩은 문화 영역에서 대외활동을 했고, 방학이면 영어캠프 교사나 자원활동을 하며 소위 스펙이란 것을 엄청나게 쌓았다. 아리스타에서 나는 날마다 문화와 해외의 경계, 어딘가에 한 자리 잡기 위해 무수한 목표들을 계획했고, 적고, 지우고, 또다시 고민하며 열아홉이 되었고 스물이 되었다.
아리스타를 떠나 이사를 가고 나서도 오랫동안 나의 지난하고 뜨거운 싸움은 멈추지 않았다. 취향이 없던 내가 아리스타로 커피라는 새로운 관심사가 생긴 것처럼, 축제를 경험하며 축제 기획가라는 목표를, 영어가 편해지며 해외라는 관심사로 나는 취향과 스타일을 견고히 해나갔다. 나는 더욱더 나에 대한 이해를 갈구했고 커피와 축제처럼 내 손가락에 걸린 작은 관심과 목표들로 점점 나를 구체화시켰다. 나는 끝없이 목표를 세웠고 이루기를 반복했다. 이력서 한 장이 모자라게 스펙을 쌓고 또 쌓았다. 그러자 나는 어느덧 내가 어떤 사람인지 소개하는데 주저하지 않게 되었다. 주저함은 내게 불충분한 자기 이해를 의미했고 나는 그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나는 그렇게 점점 내 안으로 빠져들었다.
그러나 치열하고 열정적으로 삶의 목표들을 써 내려 갈수록 내 삶은 점점 말랑말랑하기보다는 딱딱해졌고, 너른 마음으로 세상을 흡수하기보다 빠르게 건조해졌다. 목표라는 것이 본질이 어쩌면 그러했다. 구체적인 글로 생각을 적어내고 이뤄내야 할 대략적인 기간을 세우고 나면 그것들은 스스로 설정한 족쇄 같은 것이 되어 버리는 것이었다.
나는 에고라는 성의 주인이었고 동시에 하인이었다.
졸업 후에도 많은 시간을 꿈이라는 목표에 나를 끼워 맞추며 오랜 시간 공들여 보냈다. 점차 조건적으로 많은 것들이 제법 갖추어지고 있었다. 계약직을 벗어나 마침내 정규직으로, 국내를 넘어 해외에서 손에 꼽는 거대한 규모의 행사들을 기획하며 나는 커리어에서나 경제적으로나 조금씩 안정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과정 속에서 내 삶과 영혼 가운데 어떤 괴리가 있음을 느끼기 시작했다. 어떤 변화였다. 분명히 옳은 길 위에 서 있는데 왜 나는 기쁘지 않은가. 이 공허함은 무엇인가. ‘대게의 직장이 다 그렇다’는 식의 어물쩡한 설명은 내게 설득력이 없었다. 나는 분명 인생의 진리, 자아를 실현하고 유한한 삶을 값지게 쓰리라는 나의 진리의 바다로 항해해왔기에. 진리와 공허함은 그다지 어울리는 느낌이 아니었다.
서른이 된 언젠가 언젠가 하루는 용기 내어 친구에게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았다. 나는 아직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겠다고. 내가 잘하고 있는 것인지조차 알 수가 없다고. 친구는 내게 무슨 소리냐며 반문했다. 자기가 아는 사람 중에 다섯 개의 단어로 자기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 바로 나라고 했다. 대학시절에 그런 말을 들었다면 나는 분명 기뻤을지도 모른다. 장황한 설명 없이 몇 개의 단어로도 날 설명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그러나 나는 좌절했다.
나는 더 이상 그런 단어나 제한적인 정체성에 나를 가두고 싶지 않았다. 나는 날마다 바뀌고 성장하는 생명체라는 것을 나는 그제야 인정했다. 동시에 내가 품었던 꿈이라는 것 역시 최종 목적지가 아닌 지금의 과정 속에 살아 숨 쉬는 동사임을.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꿈보다도 나아가야 할 더 원대한 본질에 대해. 삶을 꿈이라는 한 부분이 아니라 삶 전체로서 볼 수 있어야 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추진력보다 영혼의 소리에 민감해지는 것이 훨씬 자랑스러워할 일이라는 것도 그제야 넌지시 알게 되었다.
나의 영혼은 몸에 메인 나 이상이다.
내가 살아 숨쉬기에 당연히 영혼 또한 살아 숨 쉰다. 나는 어떤 하나의 단어로 설명할 수 없는 에너지이다. 부단히 쌓아 올린 에고의 성은 돌이켜 무용한 것이 되어버렸다. 그것은 전혀 나를 설명해줄 수 없었다. 여전히 나는 축제를 기획하고 때로 이 일을 사랑하고 때로 이 일에 시달리며 그렇게 살아간다. 그러나 내가 이것이 아닌 그 무엇을 한데도 이제 직업이 나를 부등호로 설명해주는 일은 없을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두려움이었던 것 같다. 무엇이라도 되고 싶었던 욕망.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던 나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가진 것 없는 자의 가진 체하고 싶은 열망. 실은 세상에 그 무엇도 나를 이렇다 설명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에도 나는 무엇이 되고자 노력했다. 나는 아무것도 그 무엇도 될 필요가 없음에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