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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Unseen Universe Dec 19. 2019

9화. 나오시마

다시 나로 돌아가는 섬

                        

Life Project Age : 2부

*9화는 1화와 이어집니다*


꿈이 아니라 그저 나를, 

내일이 아니라 그저 오늘을, 

세상이 아니라 그저 내면으로, 

자꾸만 나에게로 돌아오는 섬



우정여행


할머니의 부고 소식을 들었던 것은 현주와의 20주년 여행지에서였다. 우리가 떠난 곳은 일본 시코쿠 가가와 현에 있는 나오시마라는 섬이었다. 우리가 나오시마를 여행지로 선택한 것은 어쩌면 우연, 어쩌면 필연이었을 것이다. 카페에 앉아 여행지를 뒤적이던 나는 문득 최근에 언니가 다녀온 오카야마를 떠올렸다. 생소한 지명인 데다 마땅히 들은 이야기도 없던 터라 이리저리 검색해보다가 오카야마의 인근에 나오시마라는 섬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이 섬의 수식어가 ‘예술의 섬’인 것을 보고서 우리는 두 번 고민할 것도 없이 나오시마행을 결정하게 되었다.


 

나오시마 섬의 상징, 쿠사마 야요이의 호박



현주와 내게 있어 예술은 어떤 오랜 소망과도 같았다. 현주와 나는 중학교 시절 방과 후 활동으로 아크릴화를 함께 배웠는데, 당시 미술 선생님은 시골 동네에서 보기 드문 센스를 가진 사람이라 우리는 그녀를 엄청나게 동경했고 그래서 그림도 열심히 그렸다. 복도 끝 미술실의 널따란 검은색 나무책상 위에서 아크릴화를 그리고, 붓을 빨고, 주말에는 광화문 교보문고로 나가 젯소를 사러 다니기도 했다. 우리는 또 어른이 되면 파리로 여행을 떠나 함께 그림을 그리자고도 약속했다. 퐁네프 다리 어디에선가 서로 그림을 그리자고. 낭만을 꿈꾸던 십 대 소녀들이었다. 어쩌면 어른이 되고 직장에 다니면 친구끼리 유럽여행쯤이야 쉬이 다녀올 줄 알았던 어린 날들이었다. 대학 가기에 바쁜 십 대, 스펙 쌓고 취합하기 바빴던 이십 대를 보내고, 서른이 되어서야 우리는 함께 어딘가를 떠나볼 생각을 할 여유가 찾아온 것이었다. 15년이 지난 지금 우리 모두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는 않지만 우리는 늘 어딘가에서 예술을 흠모했고 사랑했다.



한국에서 일본을 가는 것보다 오카야마 공항에서 나오시마섬까지 가는 길이 멀다는 것은 당일에서야 알게 된 일이다. 비행기와 버스, 시내에서 다시 한번의 버스 그리고 배편을 타고서야 우리는 나오시마 섬에 이르렀다. 도착하니 때는 점심이었고 허기가 진 우리는 선착장 근처에서 생선 튀김요리와 우동을 한 그릇을 먹었다. 생선 튀김은 생선에 밀가루, 그리고 소금 정도로만 간을 한 아주 심플한 요리였음에도 나는 두 손으로 생선을 들고 맛있게 먹었다. 허기를 달랜 후 우리는 마지막 교통편인 셔틀을 타고 섬의 아랫마을에 위치한 베네세하우스라는 호텔로 향했다. 



호박이 그려진 나오시마섬의 버스




숙소에 도착하니 호텔 직원이 우리를 따뜻하게 맞이해주었다. 나는 그게 진심으로 느껴졌다. 가는 길 내 이어진 가랑비와 스산한 공기 때문인지 나는 현주와 함께였음에도 왠지 모르게 쓸쓸한 공기에 움츠러들었던 것 같다. 두 명의 직원이 객실까지 우리를 에스코트해주었고 몇 가지의 매뉴얼을 - 객실 내 걸린 작품은 모두 오리지널이며 휴식을 모토로 하는 호텔인 만큼 TV가 없으니 대신 자연을 즐겨달라는 등의 – 안내한 뒤 퇴장했다. 갑작스럽게 조용해진 공간과 차분함에서 몸에 어린 일말의 긴장감이 스르르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현주와 나는 서로를 바라보고는 웃으며 말했다. ‘야 우리 성공했다!’


베네세 하우스에서 현주와 나란히



한 두 방울 떨어지던 빗방울은 빗줄기가 되었고 우리는 테라스로 나가 베네세하우스의 전경을 둘러보았다. 머문 파크동은 컨셉에 걸맞게 앞으로는 너른 잔디가 뒤로는 산이 펼쳐진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너르게 깔린 잔디와 중간중간 놓여있는 조형물들, 그 가운데를 흐르는 작은 개울물, 흐린 하늘과 저 멀리 보이는 바다. 풀냄새와 쌀쌀한 공기와 빗소리와 졸졸 흐르는 개울물 소리. 우리는 지구에 태어난 인간이라면 으레 경험하게 될 자연의 냄새와 소리 속에서 희한하게도 전에 느끼지 못한 느긋함과 안도감, 충만한 느낌 그리고 미세하게 흐르는 전율을 경험한다. 우리는 자연에서 온 생명이어서 일까. 이끼의 푸르고 비린 본연의 향이 몸 깊숙이 들어오고 나갔고, 시간도 할 일도 사라진 지금을 현주와 나는 얼마간 묵상했다. 갑자기 찾아온 고요함 속에서 한국에서 일본을 오는 것 보다도, 더 많은 시간을 버스와 배편에 보내며 꽤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숙소에서 바라본 베네세하우스의 전경



우리는 커피를 마시러 라운지로 향했다. 투숙객 전용 라운지에서는 커피와 티를 마음껏 마실 수 있었고, 베네세하우스와 나오시마 섬 그리고 나오시마의 건축물에 관한 책들도 읽을 수 있었다. 밖에는 본격적으로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라운지에는 우리뿐이었다. 아마도 나오시마의 성수기는 아닌 듯했다. 달리 일정이 없는 우리는 커피를 한 잔 씩 내린 후 소파에 앉았다. 먹먹한 하늘과 가느다랗게 내리는 비와 라운지의 고요함이 어울렸다. 현주와 둘이 나란히 앉아 우리는 커피의 표면에서 올라오는 김과 축축이 젖어들어가는 밖의 잔디를 바라보았다. 시간은 온전하게 흘렀고, 우리는 온전하게 존재했다. 어쩌면, 우리는 온전한 시간을 찾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지도 모르겠다. 느린 공기에 몇 개의 단어와 문장이 오고 갔고 따뜻한 커피는 바닥을 깨끗하게 비워져 갈색 그림자만 남기었다. 지금 이 순간 만으로 여행은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지금처럼 천천히 내 삶을 걸어왔대도 삶은 충분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조금 더 느렸더래도. 조금 더 느긋했더래도. 눈으로 보이는 결과물이 없음에 조마조마해하지 않고, 조용히 쌓이는 내면의 지식과, 한 발 내디딘 걸음, 흔들리는 삶과 끊임없이 조율하며 미세하게 조금씩 조금씩 맞춰 나아가는 내 모습을. 어린아이 지켜보듯 그저 바라봐주었대도. 그래도 나는 괜찮았을 텐데. 따뜻한 고요함 속에 잔잔히 생각이 흘렀고 그것은 조금 서글프다가 이내 흐르는 따뜻하고 평온한 공기 속에 그마저 잠잠해졌다. 생각에 잠긴 내게 방해가 될까 조용히 책을 넘기는 현주와 눈이 마주쳤다. 현주를 보며, 나는 내 삶이 얼마나 축복받았는지를 생각했다. 가슴의 심연에서 꺼낸 고동소리에 귀 기울여주는 사람이 내 삶에 늘 변치 않고 있어 주었음에 대해. 지는 해는 먹먹한 구름을 뚫고 잠시 따뜻하고 노오란 노을을 하이얀 현주 얼굴에 비치고, 이내 졌다.



대화는 늦은 저녁까지 이어졌다. 우리는 멋진 저녁식사를 예약했고, 그것은 정말이지 특별했다. 레스토랑은 미술관 내에 위치해 있었고, 내가 앉은자리 뒤에는 앤디 워홀의 원작이 걸려있었다. 저녁 6시 미술관에서의 식사는 적막했다. 레스토랑에는 우리를 포함해 세 팀만이 있었고 모두 베네세하우스에 오늘 저녁 묵는 이들 같았다. 저녁식사는 길고, 길었다. 오마카세를 먹으며 많은 채소와 해산물과 잡곡들이 테이블 위를 채우고, 위로 비우기를 반복했다. 접시는 치워도 치워도 끝이 없었고 우리의 대화도 끝날 줄을 몰랐다. 정확히 기억도 나지 않는 대화였지만, 기억나지 않을 대화가 세 시간이나 이어갈 수 있다는 것이 진짜 친구사이에서나 가능한 일임을 안다. 더 소화할 수 없을 만큼 배가 불러왔고, 옆팀도 하나 둘 떠나기 시작했다. 마지막 미술관을 나서는 손님이 되어 다시 호텔로 향하려 밖에 나오니, 가랑비는 아직도 그치질 않고 내렸다. 따뜻한 물에 몸을 녹이고, 아마도 처음으로 현주와 나란히 몸을 뉘이고 잠에 들었다. 아주 깊은 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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