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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Unseen Universe Dec 15. 2019

8화. 2015년 겨울 강남구청

스물여섯 겨울


그날 강남구청에는 눈이 내렸다. 나는 펑펑 쏟아지는 눈을 맞으며 모닝커피를 사러 가다가 내리는 눈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자동차와 사람들의 말소리가 내리는 눈으로 조금은 덮인 듯했다. 분주한 세상에 눈은 느리게 느리게 떨어졌다. 세상과 다른 속도로. 저만의 시간을 충분히 밟으며. 눈은 아주 천천히 내렸다. 나도 조금은. 눈의 속도로 살아도 좋았을 걸. 잠시 생각했다.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면. 이력서 한 줄을 위해 인생을 허비하지 않을 것이다. 결과를 위해 과정을 견디는 바보 같은 짓은 두 번 다시 하지 않겠다.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소나기가 아니라 내리는 저 눈처럼 느릿느릿 세상에 닿을 것이다. 피부에 닿는 온도, 코끝에 스치는 향기를 기억하고 흐르는 음악과 대화를 가슴에 잘 담아둘 것이다. 온도와 향기와 음악과 이야기가 내게는 어떤 형상이 되고 의미가 되고 춤과 노래가 되는지 나는 오래오래 곱씹을 것이다. 



커피를 들고 사무실로 돌아가는 아주 짧은 거리를 나는 더디게 걸었다. 진작에 내 인생을 이렇게 느린 속도로 걸었어야 했다는 것을 나는 조금 더 일찍 알아야 했다. 꿈이라는 결과를 위해 얼마나 많은 순간 오늘의 기쁨을 가벼이 여기고, 이따금 느껴지는 불편한 감정을 외면하며 살아왔는지 모른다. 내게 찾아왔던 많은 기쁨과 사람을 더 감사히 여기고, 또한 새로이 알게 된 나의 약한 면들을 배우고 보듬어가며 걸었대도 꿈이 도망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꿈은 내 곁에 생생히 살아 숨쉬었을 것이다. 내가 너무 달려들어 꿈은 저만치 도망을 가버린 것만 같았다. 



열개의 원서에서 모두 탈락을 하고서 나는 계획에 없는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마지막 한 회사의 최종 발표를 남겨두고 먼저 합격해버린 어떤 곳에 무표정한 얼굴로 출퇴근을 한지 한 달 즈음되었을 것이다. 나는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고 있었지만 더 이상 내가 하는 일이 나 다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내가 다니고 있는 직장에 대해 얘기할 때에는 많은 수식어구가 필요했고 나는 그게 못마땅하고 내심 부끄러웠으므로 더 이상 사람들과 꿈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최종 발표를 남겨둔 그곳은 대학을 졸업하던 무렵 내가 유일하게 지원서를 제출한 회사이고, 그래서 유일하게 탈락한 회사이기도 했다. 다시 탈락을 하게 되더라도 이제는 괜찮았다. 인생은 결코 계획대로 되지 않았고, 그것이 실패가 아니라는 것도 이제는 알고 있었다. 꿈은 여전히 소중했다. 그러나 그 무렵 내게 실패란 목표를 이루지 못한 것이 아니라 목표를 이루는 것만이 인생이라고 자부했던 내 어린 날을 의미하게 되었다. 꿈의 성취 여부와 관계없이 모든 삶을 내 삶으로 기꺼이 끌어안고 보듬을 수 있는 용기의 끝자락을 손에 쥐고서야, 나는 목표했던 회사에 합격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돌고 돌아서 원했던 직장에 입사하게 되었다는 것은 물론 기쁜 일이었지만 나는 이내 담담해졌다. 이십 대 후반의 내게 꿈의 직장은 더 이상 유토피아가 아니었다. 그곳에도 경쟁이 있고 갈등이 있음을 이제 나는 안다. 꿈에 대한 무조건적인 긍정이나 헛된 기대, 편협한 이상을 나는 내려놓았다. 그저 나는 매일을 귀하게 여기고, 여기에서 행복하며, 아주 조금씩 성장하기를 바랄 뿐이다. 인생에 완벽한 날은 찾아오지 않고, 다만 지금이 가장 완벽한 순간이라는 사실을 알고서 웃을 수 있는 것이 내게는 소중한 일이 되었다. 2015년 겨울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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