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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Unseen Universe Dec 08. 2019

6화. 합정역에서 불쑥 나타난 건, 나였다.

스물여섯 가을 


오늘은 지하철에서 대학생 하나가 불쑥 말을 걸었다. 제천영화제를 계기로 만난 자원활동가 친구들을 만나고 집에 오는 길이었다. 그는 어디서 나타난 것인지도 모르게, 갑자기 정지된 화면에 등장하듯 깜짝 눈앞에 나타났다. 자기는 ‘놀기’라는 동아리를 하면서 건전한 놀이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사람들에게 간단한 설문을 하고 있다고 했다. 나는 어쩌면, 밤새 뒤척이며 새벽 네 시까지 깨어 있던 어젯밤을 겪기 전 그를 만났더라면 분명 무심코 지나쳤을 것이다. 갑자기 튀어나온 그의 생글생글한 얼굴을 보며 나는 대학로 거리를 뛰어다니며 축제를 만들고, 마이크를 빌리고, 전기를 끌어오던 그 뜨겁고 지난했던 대학시절의 나를 떠올렸다. 



2011년 서울대학로문화축제(SUAF)에서 거리공연팀장을 하던 당시



나도 그 열정을 알고 있었다. 밤 열 한시 합정역에서 서둘러 귀가하는 사람을 붙잡고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용기. 좋아하는 일을 하는 순수한 뜨거움에 대해. 나는 무심한 얼굴로 이 업계에서 일한다는 게 참 쉽지 않아요,라고 하마터면 말할 뻔했다. 하루 전에 그를 만났더라면.


나는 서울세계무용축제와 전주영화제에 이어 제천에서 세 번째 행사를 치르고 있었다. 제천국제음악영화제는 축제 팬인 내게 있어 손에 꼽게 사랑하는 행사 중에 하나였기에 제천영화제의 일원이 되었다는 것은 내게 큰 기쁨이었다. 청풍호반의 바람, 스크린 위로 반짝이는 반딧불, 영화와 축제와 음악과 자연. 제천영화제는 내가 국내에서 손에 꼽는 축제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애정 어린 축제였다.


원썸머나잇 세션으로  <원스>의 마르게타 이글로바가 무대를 펼쳤던 2012년. 이 해를 계기로 제천영화제를 무척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나 행사에 제대로 발을 담그기도 전에 나는 진저리를 치게 되었다. 한 줌도 채 되지 않는 팀원 간의 갈등이 붉어졌고, 오해와 불신의 골은 합숙을 시작하며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어졌다. 축제 기획이라는 일은 본체 행사가 가까워질수록 팀원들과 밤낮을 함께하며 동고동락하거니와 ‘좋아하는 일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한다’가 사실상 이 일을 힘차게 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원동력이자 이유이기에 사람들과의 갈등 속에 행사를 치르는 것은 지옥을 걷는 기분이었다. 관객으로서 입에 침이 마르게 자랑하던 제천영화제의 매력과 소중한 추억을 몽땅 망가뜨리고서 서울로 복귀하던 날. 



나는 박봉과 불안정한 고용과 막연한 미래와 지방근무와 장시간의 노동에도 내가 이 일을 하는 이유에 대해 다시 묻고, 또 물었다. 나는 다시 제자리에 온 것만 같았다. 나는 똑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수백 번도 더 묻고 있었다. 꿈이 뭘까, 난 잘 가고 있는 걸까, 이 삶이 정말 나를 위한 걸까. 정말이지 알 수 없었다.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다는 것은 애초에 무리한 도전이 아니었을까 하고 조심스럽게 내 삶을 더듬어보았다. 



나는 날마다 박봉의 현실과 계약직이라는 불투명한 미래와 싸우고 있었다. 그 두 가지 현실적인 이유가 나를 미치도록 불안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애써 등진 체 나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설득할 만한 이유를 찾아 헤맸다. 이유는 되려 너무나 명징했다. 좋아하기 때문에. 좋아해서 나는 열정 페이를 감당할 수 있어야 했고, 불안정한 고용시장에 적응해야 했다. 내가 좋아하므로, 내가 선택했고, 선택으로 따라온 결과들도 응당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어야 했다. 



내가 그리고 싶은 미래는 원대하고 화려한 것이 아니었다. 결코. 나는 어떤 미래라도 좋으니, 그저 미래를 상상해볼 수 있는 ‘여지’를 원했다. 그러나 나는 단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오늘을 걷고 또 걷다가 이내 꿈을 가진 내가 싫어져 버렸다. 나의 열정이 지겨웠다. 재미를 포함한 모든 점에서 꿈의 도전이 실패했다고 느껴졌던 제천에서의 행사를 마치고서 나는 다시 처음부터 공채에 지원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걸 계기로 꿈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별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받아들이려던 참이었다. 



결과 발표가 있기 전 날 나는 서점에서 한 권의 책을 읽었다. ‘왜 일하는가’라는 제목의 책이었다. 졸업을 하고서 뜻 없는 직장에서 일할 때부터,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도 끝없이 고민하던 지난 수년간 스스로에게 묻던 질문이었다. 몇 장을 넘기다 그중 통제권에 관한 이야기가 눈에 들어왔다. 자기 삶에 더 많은 통제권을 가지고 자신의 선택과 의사에 따라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더 행복하다는 내용이었다. 정확하게 내 상황에 들어맞는 이야기였고, 더 정확히는 내 상황과 정확히 반대의 이야기였다. 


나는 꿈과 무관한 공채를 지원하면서 내 삶의 통제권을 온전히 상황에 넘기고 있었다. 그것은 당장의 경제적 안정을 추구하는 일 이상의 결과를 가져올 행동이었다. 그것은 (누구나가 그렇겠지만) 꿈을 삶에서 소중하게 여기는  나라는 사람의 '본질에서 멀어지는 일'을 의미했다. 나의 목소리와 꿈과 희망을 스스로 내려놓는 일이었다. 뜻 없는 공채 지원에서 나를 슬프게 만든 것은 내가 탈락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내 삶과 꿈에 대한 통제권을 내어주었다는 사실이었다.


다섯 살, 어린이집에서 처음으로 무용을 배웠다. 오래지 않아 무용을 그만두어야 했을 때 처음으로 책상 밑에 들어가 엄마에게 반항을 했던 일이 기억난다. 


축제기획자라는 꿈은 하루 이틀의 고민으로 내린 결정이 아니었다. 실은 내 가슴의 보물과도 같은 꿈이었다. 물론 처음부터 그것이 축제라는 구체적인 이름을 가졌던 것은 아니었다. 다섯 살 무용을 하던 그때부터 꿈은 조금조금씩 조정되고 또 조율되었다. 때로 그것은 발레리나였고 때로는 연예인이었다. 그것은 조금씩 수정되었지만 완전히 무관한 것이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문화판에서 나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꿈. 



나는 그것을 내 가슴의 보물로 여겼고 날마다 닦고 광내며 빛나도록 가꾸어 왔다. 마침내 도전을 해보고 나서야 내가 간과했던 가치들, 이를 테면 경제적 보상이나 직업적 안정감도 삶에 있어 필수적인 부분임을 이해하고 또 인정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내 꿈보다 선행하는 가치는 결코 아니었다. 돈과 사람과 환경은 늘 변하는 가치들이었다. 그러나 나의 꿈은 아니었다. 내 안의 우주를 세상에 내어놓고 헐값에 팔아 해치우고 있다는 기분은 나를 오래도록 슬프게 했고, 어쩌면 다행히도 세상은 나에게 그들과 잘 맞지 않는다고 대답해주었다. 


그렇게 지원한 열 개의 기업에서 모조리 탈락한 이튿날이었다. 지하철에서 그 학생을 만난 건.
모든 회사에서 깡그리 탈락하고 나서야 나는 문득 세상의 거절이 내게 희망은 아닌 지에 대해 생각했다. 



내 꿈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나는 잠시 환경에 이렇게 저렇게 휘둘리며 내 마음속 깊은 곳의 메시지가 어쩌면 잊히기를 바랐던 걸지도 몰랐다. 그러나 잠시 외면하려 했던 '삶에 대한 무책임한 나의 행동'이 삶의 통제권을 스스로 내어주는 바보 같은 일이었는지 동시에 작은 행동이 얼마나 내 삶을 의미 없게 만들 것인지도 나는 절절히 깨닫게 되었다. 



집에 가는 길, 갑자기 튀어나온 그가 놀이문화를 정착시키고 싶다 했을 때 나는 ‘나 같은’ 또 하나의 인간을 보았다. 그래서 내게 무엇을 하며 노느냐 물었을 때 그냥 무시하고 지나칠 수도, 어쩌면 안정된 직장 따위에 대해 감히 훈수를 둘 수도 있었겠지만 나는 그 말을 삼켰다. 내게도 그 순수함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순수함을 조금 더 온몸으로 지켜내고 싶었다. 그것은 불쑥 튀어나온 사람이었으나 그는 불쑥 튀어나온 나였다. 자신의 학교와 이름을 밝히며 그는 내게 가끔 도움을 줄 수 있느냐고, 자기 팀원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이런 분을 만나 뵈어 너무 기쁘다고 얘기하며 나의 전화번호를 받고 떠났다. 나는 내 삶으로 나와 당신 같은 무수한 열정들에게, 작은 길을 먼저 내어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꼭 그러하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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