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3월
다시 내 방으로 돌아왔다. 베이지색 체크무늬 이불 보와, 하얀 커튼과 하얀 벽, 책과 필기구와 향수 등이 어지럽게 놓인. 따뜻하고 밋밋하고 부산한. 아무것도 변한 것 없이 돌아온 방과 달리 내 삶의 지각은 제법 변한 듯하다.
현주와 20주년 우정여행을 떠난 지 3일째 되는 날, 아침부터 한국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할머니의 부고 소식이었다. 일본에 도착한 첫날 전달받은 친한 동료인 L의 시조모상 소식과, 이튿날 또한 전해 들은 나의 승진 소식과 함께 쏟아져버린 슬프고 기쁜 소식들의 반복들이 머릿속에 전광판처럼 반짝이며 지나갔고, 잇달아 오늘이 내 음력 생일이라는 것도 떠올랐다. 이리하여 나의 음력 생일은 내게 뒷간에서 몰래 곶감을 챙겨주던 외할아버지에 이어, 왠지 정이 가지 않던 친할머니가 소천하신 날이 되었다. 친가, 외가 모두 내 생일에 조부모를 여의게 되었다. 그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겠지만.
세상에 가끔은 묘한 일들이 생기곤 한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던 날, 아빠의 제사 머리맡에서 엄마가 아빠에게 소원을 말하니 ‘딸랑’ 하고 풍경이 울리던 날이나, 아빠의 탈상을 마치고 돌아온 저녁, 꿈에서 아빠의 방에 들어가 보니 모든 세간살이가 하나 없이 단출한 가방 하나만 문 앞에 놓여 있던 꿈같은 것들은 우연이라는 포장을 하고 나타나 내 마음을 편하게 하기도, 또 고민하게 만들기도 했다. 언니와 내가 동일한 시간 낮과 밤만 뒤바꿔 태어난 것처럼 내 생일에 떠난 두 번째 조부모의 소천 소식은 아무것도 아니면서 동시에 내 삶에 하나의 매듭으로 남을 것이다. 오래 기억될.
할머니의 부고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오카야마 현의 구라시키라는 역 플랫폼에 막 내리던 차였다. 때는 열한 시 반쯤, 여행 후 처음으로 내리쬐는 햇볕을 맞으며 플랫폼 의자에 앉아 나는 팀장님께 보고를 드리고 가까운 동료들에게 사실을 알리며 부고 신청과 상조물품 요청을 부탁했다. 그뿐이었다.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딱히 접점이 없었던 조부모의 상이 슬프거나 애통스럽지 않았다. 심지어 이 멀쩡한 내 마음에 대한 일말의 죄책감조차 느끼지 못할 만큼 나는 담담했다.
친할머니에 대해 나는 접점이 없어 무덤덤한 마음을 넘어 모종의 미운 마음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보통 가족의 감정이라는 것이 그렇듯 애증이 뒤섞인 관계에서 그 사람에 대한 좋고 싫음이 도대체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무슨 사건 때문이었는지는 정확하게 기억이 나질 않고 그저 켜켜이 쌓여온 사건과 이런저런 말들로 희뿌옇게 부정 혹은 긍정에 대한 감정들이 느낌으로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할머니에 대한 부정적인 느낌들도 정확하게 말하자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
엄마가 종종 주시던 이야기로 아빠는 아홉 형제 사이에서 제대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랐다고 했다. 가난한 집에서 아들로 자라 인근 섬으로 나무를 하러 가거나 배를 탔고, 때때로 꼭 아빠처럼 술을 좋아하셨던 할아버지 슬하에서 뭇매를 맞으며 거칠게 자랐던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아들이 걱정되는 것인지 할머니는 명절이면 언니와 나에게 ‘니 아비는 잘 있냐?’하고 거센 전라도 사투리로 물어보시곤 하셨다. 나는 정성스레 사랑으로 키우지도 못할 것이면서 그 많은 자식을 슬하에 둔 할머니가 소심한 마음을 가져 세상에 술 말고는 도피처가 없던 나의 아빠를 만든 장본인 같아 원망스러웠고, 그 무능한 술꾼이 당신의 자식이라고 찾는 것이 두 번 싫었다. 아빠에 대한 측은함과 원망들은 가족과 관계한 여러 면면에서 이토록 모순적이었고 어쩌면 나는 편의 상, 친가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을 택해버린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경조 물품 신청이 완료되었다는 문자가 도착할 무렵 나는 구라시키 미관지구에 도착했다. 이상한 감정이었다. 관광지에서 맞이하는 슬프지 않은 부고 소식은. 현주는 말을 아꼈고, 슬프지 않은 나는 이렇다 할 말을 찾지 못해 침묵했다. 미지근한 훈풍이 불어왔고 우리는 미관지구의 칸류지라는 사찰로 들어갔다. 관광지에서 조금 떨어진 조용한 사찰을 선택한 것은 현주의 배려였을 것이다. 칸류지는 얼마 전 다녀온 군산 여행에서 보았던 동국사와 떠오르게 하는 전형적인 일본식 사찰이었다. 구름 낀 하늘은 먹먹하다가 간간히 구름 사이로 해를 반짝이기를 반복했다. 아무 일도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머릿속은 날씨만큼 희뿌옜다. 먹먹한 하늘 사이로 커다란 까마귀 한 마리가 허공을 가로지르다 칸류지 마당에 놓인 나무 위에 앉았다. 가볍게 바람을 타고 나는 새처럼 할머니도 이제 날아가버렸다. 밉고 고운 마음은 다 내려놓고, 자유롭기를 바랐다.
먹먹한 하늘 사이로 커다란 까마귀 한 마리가 허공을 가로지르다 칸류지 마당에 놓인 나무 위에 앉았다. 가볍게 바람을 타고 나는 새처럼 할머니도 이제 날아가버렸다. 밉고 고운 마음은 다 내려놓고, 자유롭기를 바랐다.
지난 2월은 조금 이상했다. 설날을 끼고 업무는 한가했고, 반면에 기분 좋은 일은 넘치도록 많았다. 요즘 제법 스케줄이 바빠진 엄마를 모시고 호텔에서 수영도 하고 커피도 나누며 오랜만에 효도도 하고, 또 서른을 맞이했던 생일에는 이렇게 많은 축하를 받아도 되나 싶을 정도로 넘치는 축하와 사랑을 받았다. 그리고 어느덧 친구가 된 지 20년이 된 현주와의 우정여행으로 둘만의 첫 해외여행도 앞두고 있었다. 물질이 부족하면 채워졌고, 몸이 힘들면 쉬어 갈 수 있었다. 불편함이 하나도 없어야 할 시기였다. 그러나 매일 나는 이유모를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이 이유를 모르겠다는 것은 죽을 맛이었다. 기뻐야 하는 일이 넘치는데 하나도 기쁘지 않으니.
표면적인 기쁨과 내면의 우울 사이에서의 감정의 골이 커지는 시간 동안 나는 어둡고 긴 터널을 빠져나가는 기분을 느꼈다. 이 무렵 꿈에 아빠가 자주 찾아왔다. 돌아가신 분이 꿈에 나오면 좋지 않다는데, 생각하며 엄마에게 아빠 꿈 이야기를 하니 엄마도 아빠를 자주 꿈에서 본다며 걱정스러운 마음에 아빠를 보고 온 지 한 달 즈음이 되었다. 그러고도 아빠는 엄마와 내 꿈에 밤마다 찾아왔고, 좀처럼 꿈 따위는 꾸지 않는 언니의 잠자리에서 마저 아빠가 찾아왔다는 말에 다시 아빠를 찾아가기로 한 것이 3월 10일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현주와 여행을 다녀와 아빠를 뵈러 갈 참이었다. 여행을 다녀오고, 아빠도 뵙고 오면 이 어두운 터널도 모두 빠져나가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리고 3월 10일은 할머니의 발인일이 되었다.
이튿날 비행기를 타고 돌아와 집에서 옷만 갈아입고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이미 하루가 지난 장례식장은 조금 한산했고, 이따금 내 회사 동료들이 방문해 심심한 위로를 전했다. 밤을 새우고 다음 날 새벽 다섯 시 우리는 간단히 절을 하고 세종시에 있는 화장터로 향했다. 상을 치르는 내 이따금씩 먼저 떠난 아빠가 생각났다. 이렇게나 많은 가족이 있었는데, 아빠의 장례식은 운구를 들어줄 네 명의 남자가 없어 난생처음 보는 장례식장 직원의 도움을 받아야 할 만큼 쓸쓸했다. 가진 것 없는 아버지여서 그랬을까. 아빠의 형제들은 부고를 알리지 않고, 자기들만 왔다가 이내 가버렸다. 살아생전에 아빠를 예뻐하던 아빠의 사촌 고모들도 있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자리를 떠버린 장례식장에 아빠는 가는 길까지 엄마, 언니와 나, 셋 뿐이었다.
이어 할머니의 생가를 들렀다. 영정과 들고 찾아간 할머니의 생가는 아버지가 숨을 거둔 자리였다. 화재로 집이 전소해버린 집에서 아빠는 마지막 숨을 거두었고, 그 이후 새로 지어진 집을 와본 것은 상을 치른 후 처음이었다. 보고 싶지 않았던 아버지의 마지막을 이렇게 6년 만에서야 보게 되었다. 아빠를 똑 닮아 왜소하고 내성적인 막냇삼촌 곁을 지키며 우리는 전북 고창에 있는 홍련암으로 향했다. 홍련암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하늘나라로 가신 할아버지와, 나의 큰 할아버지, 그리고 증조부가 모셔져 계신 곳이었다. 할머니는 먼저 떠나신 할아버지의 옆 자리에 함께 안치되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30년도 더 되어 두 분은 다시 한 자리에 모셔졌고 사람들은 이내 상석을 덮었다. 사찰의 입구에 심어진 벚꽃은 이미 꽃망울을 터뜨렸고, 매화나무도 움트고 있었다. 인생의 한 장이 온전히 넘어가고, 다음 장이 눈 앞에 펼쳐졌다. 그 사실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사찰의 입구에 심어진 벚꽃은 이미 꽃망울을 터뜨렸고, 매화나무도 움트고 있었다. 인생의 한 장이 온전히 넘어가고, 다음 장이 눈 앞에 펼쳐졌다. 그 사실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