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 대신, 결혼을 취소할 수 있나요?

이 결혼은 무효야!

by 솔변

화창한 날씨. 식장을 가득 메운 하객들. 향긋한 꽃내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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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랑과 신부는 하객들의 축하 속에 혼인서약을 하고, 신랑은 반지를 꺼내든다.

신부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고, 신랑이 사랑스럽게 신부를 바라보며 반지를 끼우려는 그 순간.

덜컹, 문이 열리고 한 여자가 식장 안으로 달려든다.



"이 결혼은 무효야!!!"



하객들의 시선이 쏠리고, 남자의 얼굴엔 당혹감이 가득 찬다.

여자는 씩씩거리며 남자에게 삿대질을 한다.




"저 남자는, 유부남이라고요!"



완벽했던 결혼식은 한순간에 엉망진창이 되었고, 여자의 말은 사실이었다.

신랑은, 사실은 아내와 이혼과정이 끝나지 않았다며 변명하기 바쁘다.

신부는 당장 변호사사무실을 찾아가, 식장에 들이닥친 여자가 했던 말을 똑같이 한다.


"이 결혼, 무효 맞죠?"





웬 막장드라마 같은 이야긴가 하겠으나, 이런 사건은 현실에서 꽤나 많이 벌어진다.

궁금한이야기 y, 실화탐사대 등에서도 여러 번 보도된 적 있는 일명 [사기결혼].



결혼할 사람에게 나이, 직업, 가족, 심지어는 결혼 여부까지 속이고 결혼을 진행했다가 발각되는 일이 생각보다 많다.

(이런 사기극을 벌이는 대부분의 목적은 '돈' 때문이다).



이혼전문변호사로서 일을 하다 보면, 이런 질문을 꽤 많이 듣는다.



-"저 완전 사기결혼 당했는데, 이혼 말고 결혼을 취소할 순 없나요?'

-"완전 속았어요. 이거 혼인무효 맞죠?"

-"이혼 말곤 방법이 없나요? 저 너무 억울해요."



그러나, 비교적 간단하게 이루어지는 혼인신고와 달리 한번 법률혼이 성립되고 나면 혼인취소나 무효를 인정받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난이도로 따지면, 이혼 << 혼인취소 <<<<<<< 혼인무효라 할 수 있다.

즉, 이혼보다는 혼인취소가 훨씬 어렵고, 혼인무효는 그보다도 더 인정받기가 까다롭다.



혼인취소와 무효의 가장 큰 차이점은, 혼인무효는 '처음부터 결혼한 적이 없었던 것처럼 되는 것'이고, 혼인취소는 혼인의 효력 자체는 유효하지만 '혼인취소 판결을 받고 나면 그 이후부터는 혼인의 효력이 없다는 의미'다.



여기서 사람들이 '그러면 혼인취소와 이혼이 무슨 차인가요?'라고 의문을 가질 수 있는데, 판결 전까지는 혼인이 유효하다는 점은 이혼과 혼인취소가 같다.

하지만, 혼인취소가 되면 혼인관계 증명서에 이혼이 아닌 '취소'라는 사실이 남기 때문에 법적으로 엄밀히 따지면 [이혼] 또는 [돌싱]은 아닌 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뭐 중요하겠나 하는 사람들도 있겠으나,

실제로, 혼인취소를 원하는 분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혹은 미래에 자신이 새로운 배우자를 만날 때, '나는 이혼한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취소 사유가 있어서 혼인취소가 된 것임'을 법적으로 인정받고 싶어 한다.


(만약 내가 사기결혼을 당했다고 상상해 본다면, 현실에서는 큰 차이가 없더라도 나 역시 이혼이 아닌 취소 판결을 받기 위해 노력할 것 같다).



그렇다면, 어떤 때 혼인 취소가 가능한 걸까?



ㅣ 제 결혼을 취소해 주세요!



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혼인취소 사유는 다음과 같다.



▶ 결혼 당사자가 18세가 되지 않은 경우

: 나도 이혼전문변호사가 되기 전까지는 믿고 싶지 않았으나, 중, 고등학생들이 장난으로 혼인신고를 하는 경우가 실제로 있다.


▶ 미성년자가 부모나 미성년후견인의 동의 없이 결혼한 경우 또는 피성년후견인이 부모나 성년후견인의 동의 없이 결혼한 경우

: 18세가 넘었어도 법적으로 미성년자일 때 부모 동의 없이 혼인신고를 했다면, 19세가 된 후 3개월 이내에 혼인 취소 청구를 할 수 있다.


▶ 6촌 이내의 혈족의 배우자, 배우자의 6촌 이내의 혈족, 배우자의 4촌 이내의 혈족의 배우자인 인척이거나 이러한 인척이었던 사람과 결혼한 경우

/ 6촌 이내의 양부모계의 혈족이었던 사람과 4촌 이내의 양부모계의 인척이었던 사람과 결혼한 경우


: 쉽게 말하면, 먼 친인척이더라도 위 범위 내의 사람과 결혼하면 안 된다는 의미다.

하지만 이때 유의할 것은, 이미 친인척끼리 결혼하여 임신까지 해버린 경우엔 혼인취소가 안된다는 것이다.


▶ 배우자가 있는 사람이 결혼한 경우

: 이런 놈들이 생각보다 많다.


▶ 사기 또는 강박으로 인해 결혼의 의사표시를 한 경우

: 속았거나 협박을 당해 혼인신고를 한 경우다. 입증책임은 속았거나 협박을 당한 쪽에 있다.


▶ 결혼 당시 당사자 일방에게 부부생활을 계속할 수 없는 악질이나 그 밖의 중대 사유가 있음을 알지 못한 경우

: 앞서 해당한 사유에 해당이 안 된다면, 대부분 이 항목으로 혼인취소를 청구한다.



앞서 [이런 것도 이혼사유가 되나요?] 편에서, 민법상 '혼인을 계속할 수 없는 기타 중대한 사유'를 법원에서 폭넓게 인정하므로 이혼사유를 인정받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이혼사유와 달리 혼인취소 사유에서의 '부부생활을 계속할 수 없는 악질이나 그 밖의 중대 사유'는 법원에서 쉽게 인정을 해주지 않는다.



실무적으로, 법원에서 인정하는 '혼인을 취소할 만한 중대한 사유'는 대부분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전과를 속였거나

-가족관계를 속였거나

-돌싱인걸 속이고 결혼했거나

-숨겨둔 자식이 있었거나

-결혼하기 훨씬 전부터 심각한 질병이 있었는데 속이고 결혼했거나...



즉, 무언가를 속였다는 정황이 명백히 증거로서 입증되어야 혼인취소를 받을 수 있다.

만약 상대방이 나를 속였다는 증거가 없거나, 속였더라도 그게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면 재판부에서는 혼인취소가 아닌 이혼 판결을 내릴 확률이 높다.



-"연애 전에는 맛있는 건 내 입에 넣어주더니 결혼 후에 식탐이 드러났어요!"

-"살아보기 전엔 이렇게 위생관념 없는 더러운 사람인 줄 몰랐어요!"

-"빚이 1천만 원이라고 했는데 알고 보니 3천만 원이었어요!"

-"대머리인 걸 속이고 결혼했어요!"



따라서, 이런 사유는 아무리 내가 억울하고 분에 차더라도 혼인취소가 되기는 어렵다.



l 이 결혼은 무효입니다!



그럼, 혼인취소보다 더욱 인정받기 어렵다는 <혼인무효>는 어느 때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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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에서 규정하는 무효사유는 다음과 같다.




▶ 당사자 사이에 결혼에 대한 합의가 없는 경우

- 당사자도 모르게 날치기 혼인신고가 되어버린 경우.

으응? 내가 기혼자라고요?


▶ 8촌 이내의 혈족(친양자의 입양 전 혈족 포함) 사이에 결혼한 경우

- 혼인취소에서 규정하는 친척관계보다 더 가까운 사이에서 결혼한 경우.

생각보다 사촌, 육촌 사이에서 감정이 생기는 경우가 많다.

나도 이혼전문변호사를 하기 전에는 알지 못했다.


▶ 당사자 사이에 직계인척관계가 있거나 있었던 경우

- ex. 시아버지와 며느리, 장인과 사위, 새아빠(새엄마)와 자녀 등...

막장드라마는 언제나 현실을 따라오지 못한다.


▶ 당사자 사이에 양부모계의 직계혈족관계가 있었던 경우

- ex. 양부와 양녀, 양모와 양자 등


▶ (+ 그 외, 처음부터 혼인할 의사 없이 취업이나 비자 등을 목적으로 가짜로 결혼했던 경우도 무효로 인정받는 경우가 있다. 국제결혼에서 이런 케이스가 왕왕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혼 무효와 취소를 혼동해서 사용하지만, 법적으로는 위와 같이 뚜렷한 차이가 있다.

따라서, 이혼상담을 할 때는 이혼, 혼인취소, 혼인무효의 차이를 설명하고 당사자의 상황에 맞는 적절한 전략을 세우는 것이 변호사의 역할이다.


실무적으로는, 이혼 vs혼인취소, 이혼 vs혼인무효 중 하나만 고르지 않고 '일단은 혼인무효(또는 혼인취소)를 검토해 주시고, 만약 해당이 안 되면 이혼이라도 시켜주십시오!'라는 청구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법적으로 정확한 관점에서 위 결혼식 대사를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겠다.


"저 남자는 유부남이야! 이 결혼은 취소야!"


그리고, 속은 신부는 남자에게 혼인취소 및 위자료(손해배상)를 청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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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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