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싸움에서 작성하는 각서의 힘은 어디까지인가

각서는 마법의 무기가 아니다

by 솔변


결혼생활을 하면서 각서 한 장 안 써본 사람은 없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부부싸움에서 가장 흔한 해결 (또는 마무리) 수단으로 등장하는 게 바로 <각서>다.


각서의 사전적 정의는 [약속을 지키겠다는 내용을 적은 문서] 다.

즉, 상대방에게 무언가를 약속하고 다짐하는 내용이라면 무엇이든 각서가 될 수 있다.

부부 사이에 작성하는 각서도 종류가 가지각색인데, 그중 대표적인 것은 ‘외박하지 않기’ ‘외도에 대한 재발방지 (쉬운 말로, 다시는 바람을 피우지 않겠습니다), ‘술 줄이기’ ‘담배 끊기’ ‘친구 끊기’등이 있다.






약속을 안 지켰을 때의 제재내용 또한 다양하다.


<또 한 번 이런 일이 있을 시 두말없이 이혼하겠다>.

<몸만 나가겠다>.

<전 재산을 상대 배우자에게 넘기겠다>.

<양육권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 등등.



(몇 년 전, <또다시 무단외박을 할 시 평생 000의 따까리로 살겠음.>이라는 각서도 본 적이 있다. 각서의 내용이 너무 진지해서 결코 웃음이 나지는 않았지만, 뇌리에 가장 강하게 박힌 각서 문구다.)



때로는, 약속 불이행에 대한 제재로 금전적 배상 항목을 적기도 한다.

여러 각서를 읽어본 경험상, 부부 사이에 작성되는 각서의 금전적 배상 항목은 굉장히 높은 액수로 적혀있는 경우가 많다 (ex. 거짓말하면 그 즉시 1억 원 지급 등).

부부싸움은 그야말로 감정다툼이니 당연한 일일 테다.



각서를 받은 쪽은, ‘제재조항’ 덕분에 이 각서 한 장이 마치 오은영 박사님처럼 ‘우리 배우자가 달라졌어요’라는 마법을 일으켜 줄 거라 믿는 것 같다.

만약 배우자가 달라지지 않고 같은 과오를 반복해도, 각서가 약속한 보상을 가져다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ㅣ각서의 힘은 어디까지인가


어느 날, 갑돌이가 갑순이에게 출장을 간다고 하고 동창회 뒤풀이에서 을숙이와 술자리를 가진 사실이 발각됐다.

예전부터 을숙이 문제에 예민했던 갑순이는 화를 내며 이혼하자 하고, 갑돌이는 눈물콧물 쏟으며, 아이들까지 운운하며 싹싹 빌기 시작한다.

사실 어린 아이들 때문에 당장 이혼을 하기 어려운 건 갑순이도 마찬가지였다.



며칠간 갑돌이는 납작 엎드리는 포지션을 자처하며 평소보다 더 다정한 남편과 아버지가 된다.

갈등 끝에, 갑순이는 갑돌이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기로 한다. 대신, 각서를 받아낸다.



<갑돌이가 적은 29번째 각서>

본인은 갑순이 몰래 갑순이에게 거짓말을 하고 여사친 을숙이와 술자리를 가진 것을 인정합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으며, 앞으로는 평생 갑순이만 바라보며 살아가겠습니다.

또 다시 위와 같은 일이 재발할 시 (세상에 갑순이를 제외한 모든 여자들 포함) 모든 재산을 갑순이에게 주고 팬티 한 장만 챙겨 나갈 것을 다짐합니다.
양육권도 포기하고, 양육비로 매달 500만 원을 지급하겠습니다.

앞으로 제 인생에 여자는 갑순이와 딸래미 밖엔 없습니다.

20XX.XX.XX.

김 갑 돌


갑순이는 화가 다 풀리지는 않았지만, 각서를 받고 갈등을 봉합하기로 한다.

이렇게까지 한 이상 갑돌이가 또 사고를 칠 리가 없다고 믿는다.

설사 또 여자문제가 생기더라도, 언제든 자신의 뜻에 따라 이혼도 하고 전재산까지 몽땅 넘기겠다고 했으니 내심 든든하다.



하지만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는 익숙한 구절처럼, 일 년도 채 지나지 않아 갑돌이는 또 다시 여자 문제를 일으키고 만다.

이번엔 갑순이도 더는 봐줄 수 없었다. 갑순이는 지난번 갑돌이가 각서를 품에 안고, 변호사 사무실을 찾는다.



“각서가 있으니까, 이 내용대로 제가 다 승소하는 것 맞죠?”



하지만 변호사로부터 돌아오는 건 청천벽력 같은 ‘NO’라는 대답이다.



“남편분이 위 내용에 지금도 똑같이 동의하지 않는 한...
이 각서의 내용은 효력이 없습니다.”




법원에서는, 이혼에 관한 사항 (이혼, 재산분할, 양육권, 양육비 등)을 부부가 혼인기간 중 미리 작성해 놓는 것은 효력이 없다고 본다. 부부가 협의이혼을 하면서 작성하는 협의서(약정서)만이 효력이 있을 뿐, ‘나중에 이혼을 하게 될 경우 이러저러하게 정하겠다’라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전재산을 준다는 것도, 양육권을 넘기겠다는 것도, 매달 고액의 양육비를 준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갑돌이가 말을 바꾸면 그만이다.



미래의 이혼내용을 미리 정해놓는 것은 효력이 없다.




여기서 변호사가 가장 흔하게 듣는 질문은, ‘공증을 받아도 안 되나요?’인데, 그렇다. 안 된다.


많은 사람들이 공증 (공정증서)을 문서에 무조건적인 법적 효력을 만들어주는 만능 장치로 오해하는데, 엄밀히 말해 공증은 ‘내가 작성한 것이 맞다.’라는 것을 확인시켜 줄 뿐이고, 혼인기간 중 작성한 각서에 공증을 받는다 하여 훗날 이혼할 때 법적 효력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애석하지만, 갑순이가 작성한 각서는 ‘일 년 전 갑돌이가 여사친 을숙이 와의 문제로 이런 갈등을 일으켰었음.’이라는 사실에 대한 증거로 제출될 수 있을 뿐이다.

또한, 이마저도 오랜 기간이 지나면 각서가 있든 없든 소송의 결과에는 큰 영향이 없다.


결국, 용서를 대가로 받는 각서의 힘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l 협의이혼을 하면서 작성한 각서도 엎을 수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부부가 이혼하지 않고 살면서 미래의 일에 대비해 미리 이혼에 관한 항목들을 정해두는 것은 효력이 없지만, 협의이혼을 하면서 작성하는 약정서는 법적인 효력이 있다.


그런데 이 약정서 (각서, 협의서, 약정서.. 어떤 이름이든 관계는 없다) 역시, 협의이혼이 끝나기 전까지는 언제든지 엎을 수 있다.





하루는 중년의 여성분이 오빠를 데리고 이혼상담을 왔다.

60대를 갓 넘긴 오빠 A 씨는 평생을 기러기 아빠로 살았는데, 남편은 외국에 아내와 아이들은 한국에 있는 형태의 ‘역(逆) 기러기’였다.


TMI: 기러기는 평생 한 짝만 만나는 일부일처제 조류다.



A 씨는 외국에서 식당을 운영하면서 큰돈을 벌었고, 모든 수익은 한국에 있는 아내에게 보내주었다.

집을 사는 일이나 재테크 등 경제적인 일도 오롯이 아내에게 맡겼다.



그러다 코로나19가 터지면서 식당 운영이 어려워졌고, 환갑을 넘기면서 A 씨는 식당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젊은 시절 상당한 돈을 벌었으니, 아내와 행복한 노후를 보내고 싶다는 꿈이 있었다.



그런데 귀국하겠다는 뜻을 전하자, 아내의 반응이 왠지 떨떠름했다.

아내는 A 씨가 집으로 돌아오는 것을 영 반기지 않는 듯했다.

갑작스러워서 그렇겠거니, 하며 사업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온 A 씨. 그런데 아내가 냉랭한 얼굴로 내민 것은 협의이혼 신청서였다.


아내는 자신이 한국에서 아이들을 모두 결혼까지 시키고 역할을 다 했으니, 더 이상 부부로서 살고 싶지 않다며 이혼을 요구했다.

A 씨는 아내를 거듭 설득했지만, 이미 돌아선 아내의 마음을 바꿀 수는 없었다.


이미 성년이 되어 가정을 꾸린 자녀들은 엄마아빠의 문제는 알아서 하시라며 선을 그었다.

오랜 기간 외국에서 기러기 생활을 하면서 아이들과도 어색한 거리가 생긴 것 같았다.



결국 A 씨는 아내의 이혼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아내가 요구한 재산분할 조건은 현 주거지를 매도해 반반으로 나누는 것이었다.




“그 많은 식당수익을 다 한국으로 보내줬는데 우리 재산이 집 밖에 없다고?”




A 씨가 묻자, 아내는 크게 화를 냈다고 한다.

아이들 기르는 데 돈이 얼마나 들어간 줄 아냐고. 그럼 무슨 돈으로 아이들에게 비싼 사교육을 시키고 명문대에 보냈겠냐며 자신을 도둑 취급한다고 화를 냈다.



그러면서 아내는 카드론, 신용대출 등 각종 채무서류를 내밀더란다.

식당 수익이 점점 줄면서 오히려 자신이 빚을 만들어서 생계를 꾸렸다며, 이 빚도 나누어야 하지만 진흙탕 싸움을 하고 싶지 않으니 집만 팔아서 나누자고 말이다.



뭔가 미심쩍었지만, A 씨는 아내의 말이 맞겠거니 하며 요구를 받아들였다.

지금껏 경제권에 신경을 쓴 적이 없는 것은 사실이니 할 말이 없기도 하더란다.



A 씨는 아내와 함께 가정법원을 찾아가 협의이혼 신청을 하고, 재산분할 협의서를 쓴 뒤 공증까지 받았다.

현 거주지 아파트를 팔아 반반 나누고, 그 외에 서로의 자산과 채무는 각자 알아서 책임지기로 하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숙려기간을 보내던 중, A 씨는 집에서 수상한 서류 하나를 발견하게 됐다.

재산세 고지서였는데, 소유자는 모르는 남자의 이름이었다.

이상한 예감에 등기부등본을 떼 보니, 몇 년 전 아내 이름으로 되어있던 부동산 하나가 작년쯤 남자 앞으로 넘어간 것을 알게 됐다.

A 씨는 그 부동산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도 없었다.



아내에게 이게 뭐냐고 묻자, 아내는 아는 사람에게 잠시 명의를 빌려줬다가 다시 돌려준 것이라며 둘러댔다. ‘쓸데없는 것으로 시비 걸 거면 내 채무도 같이 나누자’는 윽박도 돌아왔다.



A 씨는 끙끙 앓다가 여동생에게 이 사실을 털어놓았다.

“뭔가 이상하긴 하지만, 이미 아파트 외에 나머지 재산은 서로 건드리지 않기로 약정서도 쓰고 공증도 받아서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며 속상한 마음에 술잔만 기울였다는 A 씨.

오빠의 서명과 공증 도장까지 찍힌 약정서를 보니 여동생도 눈앞이 캄캄해졌지만, 위 약정서 내용을 조금이라도 유리하게 바꿀 방법이 있을까 싶어 변호사사무실을 찾아왔다는 것이다.




“이미 공증까지 받아버려서... 어렵겠죠 변호사님?”




하지만 당사자들의 걱정과 달리, 의외로 내가 내놓은 답은 간단했다.




“협의이혼을 안 하면 되는데요?”





A 씨는 아직 숙려기간을 보내고 있었고, 확인기일까지는 이틀이 남아 있었다.


(※ 협의이혼을 하는 부부가 이혼신청을 하면, 숙려기간 후 ‘확인기일’에 한 번 더 출석을 해야 한다. 확인기일 후 구청에 이혼신고까지 해야 최종적으로 협의이혼이 완료된다.)



협의이혼을 전제로 당사자 간 재산분할에 대해 약정서를 작성한 경우, 협의이혼이 실제로 이루어져야 효력이 생긴다.

즉, 협의이혼이 되기 전에 이혼소송을 진행하면 기존의 합의는 무효화되고, 재산분할에 대해 법적인 판단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나의 설명을 들은 A 씨는, 협의이혼 확인기일에 출석하지 않고 소송을 진행하고 싶다고 했다.

이미 아내에 대한 신뢰는 바닥까지 떨어진 상황이었다.

설사 아내에게 다량의 채무가 있어 재산분할금이 줄어들더라도, 아내에게 어떤 재산이 있고 어떻게 사용했는지 확인해보고 싶다고 했다.



A 씨는 아내에게 협의이혼을 하지 않겠다는 말과 함께 확인기일에 출석하지 않았고, 이혼 소장을 보냈다.

소장을 받은 아내는 길길이 날뛰었고, 답변서에는 “이미 원고와 피고 사이에 합의서를 작성했으므로 다른 내용을 주장할 수 없다”라고 항변했다.

물론, 받아들여지지 않는 주장이었다.



이혼소송에서 아내의 과거 및 현재 자산 내역을 낱낱이 조회해 본 결과, 부동산 한 채가 전부라는 말과 달리 아내는 남편 몰래 마련한 부동산과 상당한 주식을 보유하고 있었다.

아내는 전업주부였기 때문에, 자금의 출처는 모두 남편의 소득이었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사실도 드러났는데, 아내는 수년 전부터 외도를 하고 있었고 1년 전 자신 명의의 부동산을 상간남에게 명의이전했다.

A 씨가 귀국을 하겠다고 이야기한 뒤, 실제로 한국에 들어오기까지 서너 달의 시간 동안 아내는 상당한 금액의 주식도 모두 정리해 상간남에게 맡긴 뒤였다.

아내가 A 씨에게 협박의 무기로 쓴 채무 역시, 카드론은 상간남과의 데이트 비용이었고 신용대출은 몰래 부동산을 마련하면서 받은 것이었다.



결국 A 씨는 아내의 나머지 재산들을 찾아내, 기존 협의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재산분할금을 받고 이혼을 할 수 있었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협의이혼을 하더라도 상대방의 말만 믿지 말고 꼭 변호사에게 상담은 한 번 받아보도록 하자. 많은 분들이 배우자의 말만 믿고 '그런가 보다', 하고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상황을 겪고는 한다).






“배우자에게 각서를 받아놓으면 도움이 될까요?”라는 질문이 들어오면, “결혼생활에서의 각서는 아이들이 쓰는 반성문과 같다고 생각하라”라고 답변하곤 한다.


즉, 결혼생활 중 작성하는 각서는 배우자가 다시는 안 그러겠다는 다짐을 믿어주기 위한 용도일 뿐, 소송에선 무기로 쓰지 못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재산분할 약정서 또한, 앞서 본 A 씨의 사례처럼 때와 상황에 따라선 무의미한 문서가 되기도 한다.


각서에 담긴 상대방의 다짐과 진심은 믿어주되, 각서의 법적인 힘을 무조건적으로 맹신하지는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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