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해,라는말
에쿠니 가오리 <하느님의 보트>를 읽고
에쿠니 가오리의 <하느님의 보트>는 가진 사랑 전부를 오로지 과거의 한 사람에게로 향하는 여성이 나온다. 과거 안의 사랑에 매몰됐다고 할까. 작가의 표현으로는 ‘소소하고 조용한 이야기이지만 광기에 대한 이야기’다. 전혀 다른 이야기지만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가 생각났다. <롤리타>역시 사랑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광기에 대한 이야기에 가까울 듯해서.
아고타 크리스토프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에서 언청이는 사랑을 구할 수 없는 시절에 사랑을 구하다가 죽는다. 사랑을 구할 수 없는 현실을 살기보다는 자신 안에 있는 사랑이라는 환상 속에서 죽어 간다.
<하느님의 보트> 속 여성은 지나간 사랑을 구현하려 하기에 현실을 살지 못한다. 지금 사랑해야 할 ‘너’보다는 지나간 사랑 속‘그’가 그녀의 현실이다. 그녀 안에 있는 ‘그’를 덜어내지 못한다. 현실을 살아야 할 '너'와는 결별이 이뤄지고 자신 안에 있는 사랑으로 고립된다. 자신 안의 사랑으로 현실에서 점점 희미해져 가는 그녀는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속 언청이와 같은 결론 속으로 들어가리라 생각된다. <롤리타>에서의 사랑이 해피엔딩이라는 결말로 이루어지지 않듯이.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속 언청이는 사랑이 없는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었기에, 절망적인 상황에서 도망치고 싶었기에 ‘사랑’이라는 것이 더 절실한 무엇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치명적인 외로움에서 자신을 구해주는 것.
<하느님의 보트 속> 여성은 십 대 시절부터 불안했다. 부모의 안정적인 양육에도 가정에서 뛰쳐나갔다. 소설 속에서 표현되지는 않지만 근원적인 외로움을 깊게 느끼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비가 내리는 날, 아이가 밖을 내다본다. 엄마, 나무는 우산이 없네 말한다.
나무는 비를 좋아해서 우산이 없어도 괜찮아. 비 맞아야 쑥쑥 크거든 이라고 대답했으나
나무가 우산이 없다는 것을 알아채는 것이 사랑이구나 생각했다. 자아가 확정적이지 않은 아이들은 나무에게 우산이 없다는 것을 알아본다. 자아가 확정되면 확정될수록 세상을 보는 시각도 자아에서 벗어나지 못할 가능성이 많다. 성인이 되면 나무에게 우산이 없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로 굳어진다.
종교에서는 신을 사랑하려면 자신이 비워져야 한다고 말한다. 신에 대한 사랑뿐 아니라 이것은 전반적인 삶 모든 것에서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사랑하기 위해 비워져야 하든지, 비워지기에 사랑을 받아들이든지. 내가 가지고 있는 것(실재가 없기에 환상에 가까운 것)을 덜어내고 ‘너’라는 어떤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사랑은 너로 인해 움직이고 있어, 다. 내 안에 어떤 것이 아니라 너의 어떤 것으로 인해 내가 움직이게 되는 것. 너를 보면서,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너와 상관없는) 내 안에 어떤 것으로만 움직이는 것이 광기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은 언제나 ‘지금’이다. 지금 너와 지금 나 사이에서 파생되는 기류이기에. 멀리 있는 것은 사랑이기보다는 그리움(경험에서 오는 환상)에 가까울 것이라 생각한다. 지금 ‘너’가 아니라 과거의 ‘너’를 보고 있는 것이기에. 실재의 너가 아니라 내 안의 너(결국 나)를 보고 있는 것이기에.
사랑해, 라는 말을 잘하지 못한다. 아이들과 생활하니 달라지기는 하지만 진지하게 사랑해, 말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내가 하는 것이 사랑해,라고 말할 수 있는 그 ‘사랑’인지 확신하지 못한다. 자신이 없다. 대신 움직인다. 너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생각하면서. 사랑해, 말이 담긴 무게에 짓눌리기보다는 부지런히 움직여 사랑을 살아내기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