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성인군자는 아니니까 1

나흘 동안 있었던 일

by 북남북녀

어딘가 슬퍼 보이는데. 남이 보는 윤혜는 이런 걸까. 여자는 사진을 들여다본다. 카메라를 들면 브이표를 그리거나 포즈를 취하면서 활짝 웃는 아이인데 어린이집에서 찍힌 사진 속 윤혜는 입꼬리가 한껏 내려갔다. 앞을 보는 눈에는 힘이 없다. 어린이집에 적응이 덜 돼서일까 생각하며 여자는 몸을 일으켰다. 임신 중기일 뿐이지만 둘째 콩콩이의 배는 윤혜와 다르게 벌써 남산만 하다. 막달 같은 무거움에 여자의 입에서 끙 신음이 흘러나온다.


첫째 날과 둘째 날까지는 한 시간씩 보내다가 오늘은 윤혜가 처음으로 어린이집에서 두 시간 있는 날이다. 아침에 윤혜를 데려다주고 간단하게 집안 정리를 한 후 누워있던 여자가 몸을 일으킨다. 오분 거리 아파트 입구 쪽 어린이집으로 뒤뚱뒤뚱 걷는다. 이십 년이 다 돼가는 어린이집으로 영세부터 일곱 살까지의 아이를 돌보기에 규모가 있는 편이다. 이제 다섯 살인 윤혜가 잘 적응하면 둘째 콩콩이까지 맡겨놓고 일을 찾아보려고 여자는 생각 중이다. 요즘 세상에 외벌이 만으로 아이 두 명을 키워내기는 무리다. 걸을 때마다 배가 뭉치는 느낌이라 여자의 걸음이 조심스럽다.


여자 앞으로 노란 건물의 어린이집이 나타난다. 하원 시간이 아니어서 어린이집은 조용하다. 안으로 들어가니 하얀 맨투맨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선생이 나온다. 이십 대 후반쯤 됐을까, 짧은 커트머리가 상큼해 보인다. 오셨어요, 윤혜의 손을 잡고 나오며 선생이 인사한다. 윤혜가 엄마를 보고 싶다고 한번 울먹이기는 했는데 그것 빼고는 잘 지낸 편이에요. 여자는 윤혜가 엄마가 보고 싶다고 울 아이는 아닌데 잠깐 생각한다. 다섯 살 될 때까지 엄마와 하루 종일 붙어 있는 윤혜는 이모만 와도 엄마는 쳐다보지도 않고 찾지도 않는다. 어린이집 첫날만 해도 한 시간 동안 함께 있으려 했더니 윤혜가 엄마는 가라는 통에 어린이집 분위기만 겨우 훑어보고 나왔었다. 여자는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네,라고 대답한다. 윤혜 손을 잡고 어린이집을 나온다.


그네를 타고 싶다고 하는 윤혜와 집 앞 놀이터로 향한다. 그네를 타는 아이가 힘이 없다. 앉아만 있다. 윤혜와 눈이 마주치자 아이가 초콜릿, 이라고 말한다. 아침에 어린이집에 가기 싫다고 해서 끝나면 초콜릿 사줄게, 한 것을 기억하는 모양이다. 윤혜 손을 잡고 슈퍼에 들러 윤혜가 좋아하는 막대기 모양의 초콜릿을 산다. 손에 묻힐 것이 염려스러워 집에 가서 먹자고 돌아가는 중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 소리가 들린다. 나무 사이로 머리 짧은 윤혜 담임이 보인다. 윤혜네 반 아이들이 점심 먹기 전 외부 활동을 나온 모양이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자 윤혜 담임 선생도 환하게 웃으며 인사한다. 윤혜야 잘 가,라고 선생이 큰소리로 인사하는데 윤혜가 선생을 멀뚱히 쳐다본다. 인사를 하지 않고 지나간다. 이상하지, 친구들이 있고 선생님이 있는데 윤혜가 놀자고 하지 않네. 선생님이 인사하는데 아는 척도 안 하고. 여자의 고개가 또 한 번 갸우뚱한다.


집으로 돌아온 여자는 초콜릿을 냉장고에 넣고 점심 준비를 한다. 햄을 물에 데치고 아침에 끓여놓은 된장국을 식판에 담는다. 인형 놀이를 하고 있는 아이 옆에 앉아 밥을 먹이는데 아이의 왼쪽 눈이 빨갛다. 실핏줄이 터졌다. 이제까지 눈이 충혈된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어젯밤에 잘 때 새벽에 깨서 갑자기 울더니 그때 이렇게 된 걸까. 여자는 아침 시간 윤혜의 눈을 떠올리려고 하나 기억나지 않는다. 어린이집에 적응하려니 힘이 든 걸까. 놀이터만 가도 놀이터에 있는 언니, 오빠들을 쫓아다니기 바쁜 아이라 적응이 수월할 줄 알았더니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다. 주변 엄마들 말로는 한 달은 지나야 한다니 여자는 더 지켜보자고 생각한다.


다음 날, 일어나기 힘들어하는 윤혜를 위해 여자는 유튜브를 검색해서 뽀로로 동요를 틀어놓는다. 계란 프라이를 해서 간장과 참기름을 넣고 밥과 함께 섞는다. 참기름 냄새에 여자의 배에서도 꼬르륵 소리가 난다. 날이 완전히 풀리지 않아서 윤혜에게 하얀색 두툼한 겨울 점퍼를 입히고 여자도 민트색 점퍼를 꺼내 입는다. 어린이집 근처에 오자 윤혜가 다른 방향으로 가려한다. 저기로 가야 한다고 하니 안 가겠다고 울먹인다. 오늘만 가면 내일은 쉬어라고 윤혜 손을 잡고 다시 어린이집으로 향한다. 어린이집 입구에서 윤혜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선다. 들어가자고 하는 여자의 말에 윤혜는 커다랗게 울음을 터트린다. 끝나면 엄마가 초콜릿 사줄게, 윤혜를 달래는데 짧은 머리의 선생이 나오더니 내가 너 이럴 줄 알았다,라고 말하며 윤혜를 번쩍 안는다. 선생이 안고 가는 와중에도 윤혜는 울음을 멈추지 않는다. 여자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 자리에 서있다. 선생에게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말하고 싶은데 이미 선생은 윤혜와 어린이집으로 들어간 뒤다. 다시 들어가서 윤혜를 데리고 나와야 하는 걸까, 여자는 오늘 보건소 예약이 되어 있다. 지금 버스를 타고 가도 이십 분은 가야 하는 보건소 예약시간에 빠듯하다. 여자는 심장이 두근거리면서도 버스정류장으로 향한다. 오늘은 윤혜가 처음으로 어린이집에서 점심까지 먹는 날이다.


버스에 탄 여자의 머릿속에서는 윤혜의 울부짖음이 계속된다. 여자는 손을 폈다, 접었다 반복하며 지금이라도 어린이집에 돌아가 윤혜를 데리고 나와야 하는 걸까 고민한다. 진동음이 울리고 사진이 보인다. 파란색 풍선이 윤혜 머리 위에 있고 윤혜가 풍선을 잡으려고 손을 뻗으며 웃고 있다. 체육시간이구나, 윤혜가 좋아하겠네 생각하며 여자는 한시름 놓는다. 가로수의 작은 이파리와 노란 개나리가 이제야 여자 눈에 들어온다.


하얀 가운 입은 간호사가 여자 팔을 주삿바늘로 찌른다. 따끔한 통증이 지나가고 새빨간 피가 주사기에 모인다. 여자는 순간 윤혜 생각이 난다. 얼른 어린이집으로 가 윤혜의 얼굴을 보고 싶다. 소변이 나오지 않아 자판기에서 식혜 하나를 뽑아 마시고 보건소 복도를 서성이는 여자의 얼굴에 초초한 기색이 역력하다.


버스 차고지가 도로 맞은편에 있을 뿐 하얀색 3층 건물 외에 주변은 산과 도로뿐이다. 몇 년 전 뉴스에서 화제가 됐던 사이코패스가 희생자를 태운 곳이 지금 여자가 서 있는 곳이다. 이십 대 여성이 보건소 건물 앞에 서있다. 중형 세단 한 대가 여성 앞에 선다. 창문이 내려가고 태워줄게요, 얼굴이 하얗고 짙은 눈썹이 아래로 향해 선해 보이는 인상의 남성이 말을 건다. 여성은 고맙습니다 말하며 차에 탄다. 서울에서 외곽인 이곳은 낯선 이에게 방어하는 본능이 도심보다 적다. 별다른 의심 없이 차에 올랐을 여성은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나라면 절대 그 차를 타지 않았을 텐데. 낯선 이의 친절에 선뜻 응하지 않는 방어심은 투철하다고 여자는 생각한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여자의 팔에 오소소소 소름이 돋는다. 윤혜를 위해 기도해야겠어, 라는 생각이 갑자기 여자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심장이 쿵쾅댄다. 여자는 버스가 빨리 오길 기다리며 정류장에 서 있다.



2편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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